사회성 없는 실력자?
※ 이 글은 사회성 이야기의 두 번째 글입니다. 사회성의 n가지 그림자에서 이어집니다.
- 원본 1: 오타쿠샵 근무가 싫은 무잔님
- 원본 2: 소년만화 최종보스가 욕먹는 이유
1.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성이 없을 경우 실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사회성'으로 퉁치긴 하지만, 이 안에는 꽤나 많은 속성들이 들어갑니다:
a. 단순히 내향형이라 사람 보기를 귀찮아함.
b.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걸 서툴어함.
c. 너무 직설적이거나 공격적으로 이야기함.
d. 에고가 너무 강해서 자신이 잘못된 걸 받아들이지 못함.
e.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설명이나 정보 공유를 등한시함.
f. 고집이 세서 타협을 안함.
(기타 등등...)
위 사항들은 서로 어느 정도씩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죄다 따로 노는 물건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처럼 단순 인격파탄자도 있지만 워낙에 극단적인 케이스므로 제외합니다. 스스로도 주니어들한테 "착한 주니어는 이런 거 따라하면 안 되요." 라고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알기는 아는 것 같습... 아니 가만, 이거 완전 그레이트 시발롬일세? 이놈이다. 이놈이 만악의 근원이다. a나 b 정도면 전문성하고는 별 상관이 없고, c라면 경우에 따라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d, e, f라면 전문성을 기르는 데 확실히 장애가 됩니다. 세상에 고수가 얼마나 많고 배울 게 얼마나 많은데 저렇게 에고가 쎄서 뭘 배우겠어요?
눈치채셨겠지만, "개발자들은 비사교적이고 내향적이야" 라고 할 때의 '사회성'은 a, b고 다른 직종 사람들이 규탄하는 '공격성 쩌는 개발자'의 '사회성'은 d, e, f에 들어갑니다. (c 같은 경우는 좀 이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별다른 악의가 없이 단순한 경험 부족으로 직설적인 표현이 튀어나오는 것과 '냉철하지만 유능한 나님' 이라는 착각 속의 캐릭터에 취한 나머지 공격질에 열을 올리는 경우는 좀 다릅니다.) '사회성'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범위가 다소 불명확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거죠.
결국 개인의 실력은 그가 몸담은 사회의 소산입니다.1 아, 사회성 나쁘면서도 실력이 있을 수 있지 않냐구요? 곧 없어질 거니까 안심하시길. 기술이 얼마나 빨리 발전하는데 에고뽕 맞은 놈이 배워 봤자지.
2.
"사회성 없는 고수" 라는 고정관념 내지 스테레오 타입도 문제입니다. 위에서 살펴봤지만, 이건 그냥 대중적인 상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창준 님의 이 글 참고.) 사실 이런 고정관념이 안 없어지는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내향적으로 컴퓨터만 잡고 있는 개발자(a, b)를 보면서 공격성 쩌는 개발자(d, e, f, ...)를 상상하거나 ('사회성'의 의미 혼동), 성질이 좀 까칠해도 능력 때문에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는 케이스를 접하거나 (생존자 편향), 특유의 강렬한 캐릭터성 때문에 클리셰가 되어 대중문화 등을 통해 확대 재생산 되거나 (예: 고X 램지), 뭐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의외로 근거라는 게 1도 없는 물건이라는 거죠.
3.
자, 여기서부터가 진짜 중요합니다. 제가 다른 직군 사람들과의 대화자리에서 위와 같은 얘기를 할 때마다 이런 반론이 나옵니다:
"아니, 내가 겪은 이러저러한 개발자는 정말 이러쿵 저러쿵 왱알왱알하게 문제가 많았는데요?"
그건 간단합니다. 걔네는 고수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이쯤에서 제가 이렇게 반문을 합니다:
"개발자가 아니시라면서요? 그런데 상대방의 전문성을 어떻게 판단하셨죠? 왜 그 얼라들이 '고수'라고 생각하셨냐고요?"
상대방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면, 저는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 스스로가 그 얼라들한테 속아넘어가신 겁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협조성 없고 에고만 강한 고수 개발자'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낚여서 그 얼라들이 고수라고 판단하신 거에요. 사실 그게 그 얼라들이 노리는 바입니다. 걔들은 그냥 실력이 없는 거고 스스로도 그걸 알아요. 걔들의 정체는 에고뽕 맞은 흔한 방구석 자칭 해커 1이에요. 걍 대중적인 고정관념 이용해서 고수 코스프레나 하고, 다른 직군 사람들한테 갑질하면서 자격지심을 푸는 거지."
4.
"제가 그랬죠? 개발자라는 직업은 엄청나게 편차가 큰 직업이라고.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런 세상에서 공공연하게 인정받는 '고수'가 뭐 하러 다른 직종 사람 자존심 짓이겨가며 위신 세우려고 들겠어요? 다른 개발자들한테 널리 영향을 미치는 '비싼 일'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다른 직종 사람 볼 시간도 없다던가, 뭐 그런 식이겠지. 솔직히 그 얼라들은 진짜 '고수'들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조차 모를껄요? 모르니까 대중적인 고정관념이나 주워다 쓰는 거지?"
5.
"다시 여쭙겠습니다. 자기 분야 '고수'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조차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고수'일 수 있어요?"
한 가지만 더.
에고뽕 맞은 개발자들의 특징 중 하나가 사실 '자기 설계/코드가 완전 무결하다고 여기는 병증'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완전 무결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소중한 나님' 에 취해서 그걸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건데요, 다른 직군에게 불친절하다는 둥, 다른 직군 사람들과 조율을 하기 싫어한다는 둥, 잘못된 걸 알려주면 화를 낸다는 둥 하는 것들은 따지고 보면 전부 파생증상에 불과합니다. 저처럼 사람 자체를 싫어하는 프로 혐성러가 아니면 대체로 그렇습니다. (다른 직군 분들 입장에서는 코드를 잘 짜니까 그러는가보다 착각할 수 있겠지만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 이런 친구들은 코드도 못 짭니다. 코드에도 사회성은 엄연히 적용되니까요.)
사실, 이걸 고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자신이 작성한 설계 문서가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박제되고, 구글에 이름이 자동 완성되는 유명인들에게 코드 리뷰 당하면서 매일같이 두들겨맞으면 됩니다 - 이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1주일이면 아주 확실하게 고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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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건 개발자 사회에서만 통하는 법칙이 아니라 꽤나 보편적인 법칙에 속합니다. 일본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의 실력을 부정하는 근거 중에도 당당하게 이게 끼어 있거든요. 일본의 이름난 검호들을 살펴보면 죄다 이런 식입니다: "천황 앞에서 열린 어전 대회에서 XX를 이기고 우승했다." "이름난 검객 XX를 시합에서 꺾었다." "이름난 스승 XX에게서 배우거나, 이름난 제자 XX가 있다." "초심자 시절 에도(江戸)의 도장을 돌아다니며 시합을 하다가 숱하게 쳐맞았다." 검호는 검술가 사회의 소산이라는 얘기인데, 정작 무사시는 여기에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 교차 검증해 보면 무사시가 최강의 검술가 뭐 그 수준은 아니었고, 그냥 제법 이름이 있는 정도의 사람이었다는 애깁니다. 지금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검객 무사시의 이미지는 그냥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캐릭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