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션? 쿠션!

사람마다 달라지는 쿠션어의 정도에 대하여.

※ 이 글은 사회성 이야기의 세 번째 글입니다. 사회성의 n가지 그림자, 사회성 없는 실력자?에서 이어집니다.

1.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저는 극단적으로 사람 얼굴 보기를 귀찮아하고 서툴어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지 전혀 감도 못 잡는다고 하면 정확하겠네요. 실제로 몇 달 전에는 친한 형과 만나는 자리에 형수 될 분이 갑자기 나오셔서 셋이 함께 봤는데, 형수 될 분과는 덜렁 인사만 하고 형이랑만 두 시간 넘게 대화하다 가는 초대형 사고를 친 적이 있습니다. 뭐 형수 되실 분이 워낙에 너그러우신 분인 데다 그 형님이 잘 설명을 해 주셔서 어찌어찌 넘어가긴 했습니다만 (저와 달리 사회성이 MAX이신 분이십니다)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르는 일이죠. 이렇게 제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의심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술과 사회성, 인격의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신 이런 분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문답무용

또 하나, 저 같은 사람은 워낙 둔하다보니 '쿠션어' 같은 걸 전혀 이해하질 못합니다. 좀 우습지만, 제가 '쿠션어'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즐겨 보던 웹툰을 보면서였습니다. 아래 장면인데요 - 소설가가 된 주인공(♀)이 일러스트레이터(♂)와 첫 미팅을 갖는 부분인데, 작품 초안을 본 일러스트레이터가 솔직히 이 작품은 자기 취향도 아니고 현실성도 제로인 것 같다고 하니까 주인공이 발끈하는 부분입니다.

『유미의 세포들』 제 356화, "프로들의 업무미팅 1"

웹툰 보신 분들은 알겠습니다만 (유료 회차인지라 결제해서 보셔야 합니다.) 저 대목에서 댓글창에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개무례하다, 니 예의세포는 어디 끓여먹었냐, 컨트럴 즤가 아니라 싸가즤 아니냐 뭐 이런 표현들이 난무했는데요, 정작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저렇게 발끈할 것까지 있나?" 하는 생각을 했더랍니다. 애시당초 (몇 안 되는) 주위 사람들이 전부 직설적인 데다가 이런 거나 보고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미만 있으면 되지, 현실성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거든요. 아무래도 주 독자층이 여성층이다보니까 저랑 생각이 많이 다를 거라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컷마다 베댓을 꼼꼼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지금까지 여자는 어떻게 만났냐는 질문이 나올텐데, 대한민국 여성들은 남편/애인 지인의 겉모습만 보고 친한 동생을 짝지워 주려고 하는 파멸적인 관습을 버려야 합니... 아니,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제가 나쁜 놈입니다. 대X리를 땅바닥에 접지하겠습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피해자가 몇 명이야? 이 막장인생의 죄상을 논고하자면 뒷산의 대나무를 죄다 붓으로 깎아 써도 모자랄 것이다. 사회성 파탄자, 그는 당신 짝꿍의 이웃, 친구, 절친한 후배일 수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저는 새로운 얼굴 보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작년 말, 지인으로부터 자기네 서비스 장애 났으니 좀 도와 달라고 연락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네 회사로 좀 와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어떻게 원인을 찾아야 하나 이런 게 아니라 "거기 가서 또 새로운 얼굴 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중증이죠.

2.

보통 저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정상인(외향형)들은 사회성 좀 키우라고 잔소리를 하곤 합니다. 근데, 우리라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내향형이 외향형을 이해 못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정상인들은 처음 본 사람끼리 대화가 없는 걸 못 견뎌하고, 이것저것 말을 건네면서 대화를 시도하는 걸 호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런데 정작 우린 그런 거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애시당초 자연스럽게 친해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니까) 그렇게 억지로 말을 붙이는 것도 귀찮고 그게 호의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대화가 귀찮아서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하는 내향인한테 어떻게든 대화를 붙여 보려고 억지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다가는 사고 터집니다. 더 나쁜 건 상대방이 왜 짜증이 났는지, 외향인들이 짐작조차 못 한다는 겁니다. 외향인들은 다른 사람들도 전부 외향인인 줄 알거든요. 그냥 상대방이 자신의 호의를 짓밟았다고 생각하겠죠.

네, 무슨 생각 하시는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유미의 세포들』 제 367화, "분위기 급반전")

(심지어 "회식자리에 끌고 가서 술을 잔뜩 먹여봐야지!"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물어서 대화를 유도해 내면 되겠어." "야한 농담 싫어하는 남자 봤어? 음담패설을 던져 보자!" 라고 생각하면... 음, 뒷일은 책임 못 집니다.)

쿠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친한 지인 넷이서 족발을 먹다가 쿠션어가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 중 두 사람의 반응이 "뭘 저런 걸 짜증나게시리 빙빙 둘러서 말하고 있냐!" 인 걸 보고 아차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쿠션어라는 게 상대방의 기분을 배려해서 하는 것인데, 오히려 짜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죠. 이전까지는 막연하게 "굳이 저 정도로 돌려 말할 필요가 있나?" 하는 정도였는데, 이걸 보면서 아 이거 또 사고 터지겠구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쿠션어를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면, 상대방은 자신의 호의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우리가 우리끼리 몰려다니듯이 외향인들은 외향인들끼리 몰려다닐 것이고, 쿠션어 같은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 못 할 겁니다. 강아지가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면 고양이는 결투 신청으로 받아들인다? 이건 인간 세계에도 해당되는 거죠.

3.

저는 그냥 현실을 인정하고, 문제 해결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아예 쿠션어고 뭐고 나올 상황 자체를 안 만들어버리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공구리를 친다' 고 부릅니다. 제가 저 장면의 일러스트레이터(♂)였다면, 아마 이렇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음... 사실 이 작품은 제 취향과는 좀 거리가 있고 현실성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작가님이 뭔가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하신 거겠죠?

자, 여기서부터가 중요해요. 지금부터 저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캐릭터와 서사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도록 노력할 거에요. 다만 제가 작가님의 의도나 이 작품의 '현실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 이 부분은 김유미 작가님이 보면서 잡아 주셔야 합니다.

작업 중간중간에 제가 파악한 내용을 함께 보여 드리는 건 제 일이고, 그걸 컨펌해서 피드백 주시는 건 김유미 작가님의 일이에요. 자, 이제 문제 해결에 집중하시죠.

기분이나 느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지금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함으로써 그 이상의 이야기가 오갈 여지 자체를 잘라버리는 거죠.1 좀 극단적인 방법이긴 합니다만,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어차피 그 이상의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면 제 빈약한 사회성을 가릴 수가 없을 테니까요. 이것저것 다 해보긴 했는데 그게 저한테 맞더라구요.

따지고 보면 모든 성장 서사의 근간은 "그게 나한테 맞더라고." 인지도 모른다. (『유미의 세포들』 제 434화, "당신이 받고 있는 시그널 2")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서비스'가 아니라 '기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지금은 '기술'을 하고 있지만, 저도 예전에는 대부분의 개발자들이 하듯이 '서비스'를 개발했습니다. 하루하루 출근하는 게 고역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 '서비스' 자체가 저한테 안 맞는 탓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서비스 개발 자체가 새로운 (다른 직군)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거든요. 우연찮은 계기로 저한테 맞는 일을 찾게 되면서 겨우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기술'도 결국 많은 이해 관계자들의 그림자를 봐 가면서 해야 하는 일인 만큼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만, 어쨌거나 직접 얼굴을 볼 일이 없다는 점은 제 절망적인 낯가림을 가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타 직군 사람 얼굴 볼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그게 문제가 되었던 적은 없는 것 같네요. 제가 이런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사람으로 치면 이미 응급실에 실려와서 기도 삽관 들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에 쿠션어고 뭐고 따질 필요가 없거든요. 어차피 함께 서비스 만들어 가면서 계속 얼굴 볼 사이도 아니니까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 구라가 들통난 야바위꾼이 좌판 걷어서 도망가듯이 사라지면 된다는 점도 장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시계가 좋은 이유하고도 비슷합니다. 시계는 내 주인놈이 왜 이렇게 노잼이냐고 불평하지 않죠. 매일 기분따라 바꿔 차도 상관 없고. 랑에 삭소니아는 기계식 시계 날짜창의 이상이며 이는 드레스덴 오페라 하우스 벽시계로도 증명할 수 있다. 반박시 니 말이 다 맞음.

4.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간 그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발팀에게 간략히 상황 설명을 들은 저는 기획자 분 좀 모셔올 수 있냐고 했습니다. 기획자 분이 달려오자,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자, 기획자님 잘 들으세요. 데이터베이스 강의를 할 것도 아니니까 최대한 짧게 이야기할께요.2 서비스의 가운데에 있는 메시지 교환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했어요. 지금부터 복구 작업 들어갈 건데, 데이터 유실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각각의 경우에 어떤 사후 조치가 필요한지 알고 싶어서 이렇게 와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저는 공구리부터 쳤습니다: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이런 소리 하니까 못 미더우시겠지만 절 믿으셔야 합니다. 저는 직업적으로 이거 다루는 사람이에요."

공구리 화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고, 내가 상대방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는 것이겠다. 내가 뭔가를 하고 싶어서 한다는 티를 내면 절대 안 된다. (원본:『유미의 세포들』 제 367화, "분위기 급반전")

"어디까지 데이터 유실을 허용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건 기획자님 일입니다. 해결 방법을 찾아내는 건 제 일이 되겠죠. 서비스를 살리는 건 여기 계신 개발자 분들이, 뒷수습은 아마도 마케터나 이런 분들이 하셔야 할 겁니다. 알아들으셨죠? 자, 어차피 장애는 발생했어요. 이제 현실을 인정하고 문제 해결에 집중하시죠."

5.

문제가 해결되고 며칠 뒤, 넷이서 함께 밥을 먹자는 연락이 왔지만 거절했습니다. 말주변도, 재미도 없는 저 같은 사람이 그런 데 끼어봐야 좋을 것도 없고 무엇보다 같은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죠. 그날 저녁, "우리 개발팀에도 g씨 같은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같은 대화가 오갔다고 합니다만, 아마 이런 게 쿠션어인 모양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선약이 있었습니다. 개발자 사회 밖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2021년 12월은 널리 사용되는 라이브러리에서 발견된 심각한 보안 문제 때문에 전 세계가 발칵 뒤집어진 때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참여하고 있던 프로젝트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하필 관련 기능을 담당한 게 저였고, 제가 작업한 부분이 정식 배포판에 들어가기 전에 문제가 먼저 터져버렸습니다. 보안 문제이니만큼 다음 버전이 릴리즈되는 시점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상대가 전부 개발자들인지라 좀 더 편하게 공구리를 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자, 그럼 상황 정리하죠. 미국 서부 시각으로 18일 0시까지 보안 픽스가 적용된 프리뷰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패치를 하는 건 제 일이고, 서버에 배포하고 관계자들을 안심시키는 건 님들 일이에요. 구글에 치면 바로 나오니까 새 버전 나오면 잽싸게 가져가시구요. 알아들었죠?"

제가 그날 함께 저녁 먹자는 제안을 거부하고 작업하러 간 것은 이날 약속한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좀 이상하지만, 그것도 나름 사회성의 발로였던 겁니다. 쿠션어가 사회성인 사람들이 있다면 어딘가에는 방구석에 앉아서 코딩하는 게 사회성인 사람도 있겠죠. 작업을 마무리하는 내내 어찌 되었든,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충돌 같은 게 없다면 쿠션이든 공구리든 별 상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멘붕 다 했지? 이제 할 일을 하자. 현실을 인정하고, 문제 해결에 집중해."


  1.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차렸겠지만,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 라는 점을 상대방에게 납득시킴으로써 좀 투박한 행동이 나가더라도 넘어가게 만드는 것이 이 화법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서 이 경우라면, 작품 내용을 사전에 꼼꼼하게 파악하고 의견을 맞추기 위한 참고 자료도 미리미리 준비해서 가는 것. 평소에 운동을 좀 해 두면 설득력을 높이기에 유리해지는데, 내 경우 학교 다닐 때 운동부였던 것이 이런 때 도움이 되었다. 

  2. 이 대목에서 "설명하면 아세요?" 처럼 공격적으로 대응하면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