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식 군대의 교관으로 일본에 온 미군 출신의 알그렌 대위는 구식 사무라이 군대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다. 처음엔 머나먼 이국에서 온 적일 뿐이었던 그는 겨울이 가는 동안 사무라이들에게 동화되고, 그들의 인정을 받는다.

1.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4)』의 한 장면. 사무라이 마을에 포로로 잡혀 온 알그렌이 영주의 충신(우죠, 사나다 히로유키 분)과 목검 대결을 하는 중이다. 우죠는 영주인 카츠모토를 대신해서 전투를 지휘하는 실력자고, 당연히 검술 실력도 만만치 않다. 한 번, 두 번, ... 하지만 세 번째 대결에서, 알그렌은 우죠와 비긴다.

2.

짧은 장면이지만, 이 앞에는 복선이 있다. 영화 초반, 신식 군대의 고문관으로 일본에 온 알그렌이 카츠모토가 이끄는 구식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해서 포로로 잡혀 온 뒤의 장면이다. 어느 날,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던 알그렌이 어린 아이들이 목검 대련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다 날아간 꼬마의 목검을 주워 주는데, 정작 그 꼬마는 망설이며 받지를 않는다. "아이들이지만 강합니다. 한 번 대련해 보시죠." 경호하던 무사의 권유를 받은 알그렌이 목검을 잡는데 대련은 개뿔, 키가 허리에나 올까 말까한 상대방 꼬마가 자길 잡아먹을 듯이 이를 악물고 덤벼드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지나가던 우죠가 그걸 봤다는 것이겠다. 우죠는 알그렌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그 칼에서 당장 손 떼!!" 알그렌이 목검을 순순히 놓지 않자, 우죠는 상대방 꼬마가 잡고 있던 목검을 가져다 인정사정없이 두들겨팬다. 결국 알그렌으로부터 목검을 빼앗은 우죠는 퍼붓는 빗속에 알그렌을 던져놓고 가 버린다.

3.

단순히 알그렌에게 감정이 있던 우죠가 구실을 잡아서 두들겨 패는 장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장면은 의외로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 전체에 걸친 알그렌의 내적 갈등을 온전히 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유명한 일본 소설가 하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몇 년 동안 재즈 바를 경영하면서 내가 써온 거라고는 세금 신고 서류와 간단한 편지 정도가 전부였지만, 야구장에서 혼자 야구를 보다가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바로 원고지 한 뭉치와 만년필을 하나 사와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이 때 쓴 중편 소설이 문학상을 받으면서 등단했다." 하지만 그의 성장 배경과 어린 시절을 살펴 본 사람들은 조금 다른 평을 한다: "자신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툭 튀어나왔다고 하는 게 더 알맞을 것이다."

나는 빗속에서의 목검 대결을 묘사한 이 장면이 알그렌의 본심이 툭 튀어나온 순간이라고 믿는다. 알그렌은 자기 자신이 싫다. 명예로운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맡겨진 역할은 추잡한 짓에 앞잡이나 서는 일이고, 그게 싫어서 전역하고 하는 일이란 총기상의 판촉 행사에서 서커스단의 원숭이마냥 재주나 부리고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옛날 일이나 늘어놓는 게 전부다. 그나마 그 일도 술을 너무 퍼마셔서 쫓겨날 판이다가 돈만 보고 말도 안 통하는 이역만리까지 왔는데, 이번엔 전근대 군대에게 크게 패해서 꼴사납게 포로가 되고 하나 있던 친구마저 죽어버렸다. 알그렌과 이야기를 나눠 본 카츠모토가 알그렌을 마음에 들어해서 자기 마을에 머물게 해 주지만, 어린 아이들도 알그렌이 주워 준 목검을 선뜻 받으려 하지 않을 정도로 괴물 취급이나 당한다.

자신을 포로로 잡아 온 카츠모토에게 알그렌은 묻는다: "나한테 도대체 뭘 원하는 거죠?" 그러자 카츠모토가 오히려 받아친다: "자네는 자네 스스로에게 대체 뭘 원하나?" 알그렌은 과거 자기가 학살했던 원주민들이나 현재 자기를 포로로 잡은 사무라이들처럼 영적인 존재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그런 점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곳은 하늘이라기보다 알그렌의 마음 속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4.

통념과는 달리, 칼은 엄연히 보조 병기일 뿐 주력 무기와는 거리가 있다. 흔히 칼만 쓰는 것처럼 그려지는 사무라이들도 창이나 총을 주력 병기로 애용했지 칼이 메인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칼은 무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다른 사정이 있다. 평시에 정장의 일부로서 휴대하는 물건인 데다가 일종의 기초 교육으로서 무사 훈련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도 막부 시기, 쇼군 직할령이 아닌 한 기본적으로 평민 따위에게 칼을 잡는 걸 가르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평민 출신 검객이라는 건 굉장히 비상식적인 케이스에 속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알그렌이 굳이 목검을 잡고 꼬마와 겨뤄 보고 싶어하는 이유가 보인다. 비록 키가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꼬마지만, 알그렌은 무사가 되기 위해 훈련받고 있는 그 꼬마가 부럽고,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다. 반대로, 우죠가 이 모습을 보고 알그렌에게 그 칼 놓으라며 불같이 화를 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우죠 입장에서는 서양에서 건너 온 도깨비 따위가 무사의 상징에 손을 댄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 실제로 목검을 잡은 우죠는 알그렌을 말 그대로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는데, 앞에서 나온 꼬마들끼리의 대련 장면이나 위에서 소개한 대련 장면과는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우죠는 알그렌을 대련 상대로 보지 않는다 - 그러니까, 알그렌을 자기 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여담이지만 우죠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보통 영화 홍보용 월페이퍼는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우죠만은 조연인데도 여기 나왔습니다. 바로 위 이미지인데, 우죠가 전쟁터에서 착용하는 거대한 뿔투구가 잘 묘사되어서 마음에 듭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무구 역시 19세기의 것이라기보다 철포 전래 이전, 전국시대 중기에 좀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죠가 알그렌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장면은 영화 맨 앞에 한번 더 나온다. 신식 군대와의 전투 중, 저 서양인을 산 채로 잡아오라는 카츠모토의 명에 잡혀서 끌려 온 알그렌의 목에 우죠가 칼을 뽑아서 들이대는데, 알그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카츠모토와 우죠는 알그렌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본다. 이렇게 적으로서 진검을 들이대거나 목검으로 마구 두들겨패던 우죠는 어느 화창한 날, 자신과 비긴 알그렌을 마침내 인정하고 등을 두드려주게 된다. 이 시점에서 알그렌은 끔찍하기만 했던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사무라이의 일원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5.

모두의 인정을 받은 알그렌은 포로로 잡힌 적이 아닌, 카츠모토의 심복으로 자리잡는다.

작가는 이 짧은 신 안에 알그렌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내적 변화를 이다지도 시적으로, 심지어 유머까지 섞어서 그려냈다. (누가 이기느냐를 두고 내기를 하던 무사 둘이서 눈이 휘둥그레져서 알그렌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라.) 이 장면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 역사적인 사실과는 물론 거리가 있, 아니 매우 많다. 걍 와패니즈 영화는 와패니즈 영화로 보시길. 그래도 영화 자체는 아주 잘 뽑혀져 나와서 다행이긴 하지만.


영화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조금만 더.

영화에서 알그렌이 신식 일본군의 고문으로 온 것은 1876년이고, 영화의 주 배경은 한 해가 지난 1877년이다. 그리고 알그렌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건은 커스터 대령이 이끄는 제 7 기병대가 샤이엔 족 촌락을 기습하여 학살한 와시타 강 대학살 (Washita Massacre, 1868)이다. (이 토벌 작전을 명령한 사람은 남북전쟁 당시 기병전으로 유명했고 이후 인디언 전쟁에서는 강경한 초토화 작전으로 악명이 높은 쉐리던 장군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훗날 미군의 공수 전차인 M551 셰리던에도 붙었다.) 알그렌이 대위로 전역한 걸 보면 와시타 강 대학살 때도 위관급 초급장교였을 것이니, 대략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날 때쯤에 임관해서 대충 전시계급으로 진급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원래 계급으로 돌아와 군대에 남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 오랫동안 커스터 장군은 인디언 전쟁의 상징으로서, (특히 헐리우드 영화와 정통 서부극에서) 야만스러운 원주민에 맞선 백인의 영웅으로 포장되어 왔지만 1960년대 이후의 연구는 이렇게 신화화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얼굴을 보여 준다. 나름 남북전쟁 때는 꽤나 유능한 장교였던 듯 하지만 인디언 전쟁 때는 그냥 잔혹한 학살자에 불과했고, 작전 능력도 시원찮았던 것이다. 와시타 강 대학살 때도 원주민 전사대를 추격하던 휘하 중대 하나를 적진에 그냥 내버려둬서 전멸하게 했고, 훗날 리틀 빅혼 전투(1876)에서 패해 전사한 것도 원주민을 얕잡아보고 정찰도 없이 원주민 촌락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포위를 당해 전사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와시타 강 대학살 때 전사한 중대장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당시 커스터를 비난한 편지가 언론에 공개되어 커스터에게 "너 두고보자" 라는 말까지 들었던 부하 프레드릭 벤틴 대위가 리틀 빅혼 전투 당시 후위를 맡고 있었다. 그 점에서 벤틴이 커스터가 죽게 내버려둔 게 아닌가 하는 부분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그 점에서 커스터는 묘하게도, 사단 참모로서는 최고라는 평을 들었지만 그 이상의 자리에서는 극도로 위험하고 사악한 인물이었던 츠지 마사노부를 연상시킨다.

이걸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와시타 강 대학살 당시 커스터 장군은 잡아온 원주민 포로 중 한 부족장의 17살 먹은 딸 하나를 개인적으로 데려갔다. (전투 보고서에는 통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정작 이 여자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성노리개로 가져간 것인데, 이듬해인 1869년 아들까지 하나 낳았지만 결국 이를 알아챈 커스터의 본처가 대노하여 와이오밍 주로 쫓겨났다는 증언이 이 불행한 여인의 마지막으로 알려진 행적이다 - 이 사건은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야겜(...)에 소재를 제공했을 터인데, 결국 이 게임은 엄청난 항의를 받고 판매 금지 처분되었다.

문제는 커스터가 불임이었던 탓에 이 아이의 아버지는 확실히 다른 남자일 거라는 점이겠다 -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괜히 알그렌의 과거를 '추잡한 짓 앞잡이나 했다'고 하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