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왕국은 왜 몰락했을까

수많은 갑옷 유물을 남긴 철의 왕국 가야.

왜 신라에게 멸망당했을까?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 ‘갑옷들’ 때문이다.

들어가기 전에 문제 하나.

자, 아래 사진들은 각각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시점은 모두 5세기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갸야 갑옷. 5-6세기. 경상남도 함안 도항리 무덤 출토.

신라 금관. 경주 교동 출토. 5세기.

수많은 유물들 중 일부일 뿐이지만, 둘의 차이가 중요한 것은 이유가 있다. 가야와 신라의 엇갈린 운명을 간단명료하게 보여 주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과시용 무덤, 고분

흔히 고분이라고 하면 오래된 큰 무덤을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지배자의 무덤으로서 일반 백성의 무덤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 이 정확하다. 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서 큰 무덤을 만들면 과시가 되기 때문에 큰 경우가 많을 뿐이다. 고구려를 제외한 한국의 고분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일본의 고분들에 비하면)상당히 아담한 편인 게 보통이다.

그런데 본질이 과시용 무덤이다보니, 부장품도 과시가 될 만한 물건들을 많이 집어넣게 된다. 일반 백성들이 가질 수 없거나, 그 자체고 지배 계급임을 상징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종교 예식에 쓰이던 방울이나 수레에 쓰이는 마구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건 요즘으로 말하면 “아무나 못 가지는 물건” 들로서, 당시 지배 계급의 특권과도 같은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덤에 부장되어 지금까지 남은 것이다.

문제는 5세기 후반을 넘어가면서 가야 고분과 신라 고분에 부장되는 유물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금관과 갑옷 사이

현존하는 고대 한국 갑옷의 60% 가량이 가야 갑옷이다. 2위인 신라 갑옷의 3배에 달하며, 상태도 압도적으로 좋다. 부산 복천동 박물관처럼 아예 가야 갑옷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정치 권력의 성립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폭력 체계가 필요하다. 피지배민들의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가 발달하면 무력을 통한 통치보다 법을 비롯한 사회 시스템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중요한 것은 무력이 아니라 정치적 권위가 된다.

신라의 경우 5세기를 넘어서면 갑옷을 무덤에 묻는 경우가 줄어든다. 설령 부장한다고 해도 금동으로 장식한 투구 같은 의장용을 쓴다. 대신 비중이 늘어나는 것이 바로 금관과 같은 정치적 상징물이다. 신라는 무력으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수준을 벗어난 것이다. 내물 마립간(재위 356 ~ 402) 이후 신라는 박씨, 석씨, 김씨의 세 왕족이 돌려가면서 왕을 맡는 체계에서 벗어나 경주 김씨에 의한 장자 상속이 확립된다. 중앙 집권 국가로 가는 길목에 선 것이다. 무덤에 금관을 묻는 것은 이러한 상황의 반영이다.

황남대총 출토 신라 금관. 5세기 추정. 국보 191호. 국립 경주박물관 소장.

그렇다면 가야는? 가야 고분에서는 5세기가 넘어 6세기에 이르기까지 갑옷 부장이 계속된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아직도 무력을 통해 사회 체계를 유지해야 할 수준이라는 얘기다. 연맹 왕국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중앙 집권 국가를 만들기 위한 요소로 이야기되는 것 중 하나가 불교의 도입인데, 가야에는 불교가 전해진 것 같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유치한 사회 구조를 가진 가야의 소왕국들과 이미 중앙 집권 시스템을 갖춘 신라. 벌써부터 승패가 보이지 않는가?

가야 왕국들이 소왕국에서 발전을 멈춘 것에도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초기부터 철을 수출하는 국제 무역항으로 너무 잘 나간 탓에 통일이 되지 않았다는 설이다. 신라의 경우 경주에 있던 사로국이 주변 소국들을 하나씩 흡수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가야 소국들의 경우 다른 나라들을 흡수할 정도로 압도적인 세력을 가진 나라가 나타나질 않았다. 너도나도 고만고만했기 때문이다.

  • 비슷한 경우를 중세 이탈리아에서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경우, 너도나도 부유한 탓에 오히려 통일을 이룰 만큼 압도적인 세력이 없었다.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것은 1871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철의 제왕’이기 때문에 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역설적인 결론

많은 사람이 궁금해한다. “이렇게 많은 무기와 갑옷들을 남겼으면서 왜 신라에게 멸망당했을까?”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이건 반대에 가깝다. 갑옷 같은 걸 유물로 남길 수준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금관을 유물로 남기는 신라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좀 웃기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 걸.

참고문헌

신경철, , 국사관논총 제 7집, 국사편찬위원회, 1989

7 thoughts on “철의 왕국은 왜 몰락했을까

  1. 음 글쎄요, 왕관이 아니라 갑옷을 부장품으로 남기는 사회에 대해서는 가야가 철기가 발달했다기 보다는, 신라에서는 갑옷 따위는 더 이상 부장품으로 남기기에는 충분한 값어치 내지는 희소서이 없다고 해석한다면, 가야가 철기가 발달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수는 없을까요? 즉 신라에서는 철제 갑주는 흔해져서 더 이상 부장품으로서의 값어치가 없어졌다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요

    • 약간 오해가 있군요. 신라에서 갑옷을 부장하지 않은 건 희소성이 없다기보다 과시의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개 희소한 게 과시의 대상이 됩니다만, 안 그런 경우도 많거든요. 철제 갑옷은 어떤 시대건 간에 상당히 희소한 물건입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할 뿐이죠.

      도검의 경우 그 자체로 정치적 권위도 상징하기 때문에 6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 부장되는데, 거기서도 신라의 철기 수준이 가야를 압도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걸로 봐서 신라와 가야의 철기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났던 것 같지 않습니다.

  2. 오오 언제나 재밌고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이번 글도 역시나 재밌고 공부가 되는군요. 근데 위에 tloen님 말씀도 일리가 있어보이고..?

  3. 과연 왕의 시대와 전사의 시대, 남은 성주시대 테크 타는 마당에 혼자 봉건시대 테크타고있다간 자원을 얼마나 쌓아뒀건 기사 러쉬로 조트망하는건 순리죠. 창병을 대량으로 뽑아뒀다면 또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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