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없는 나가사키는 장식에 불과합니다.

안 드셔 보신 분들은 그걸 모르죠.

2010년 8월 19일
일본 규슈(九州) - 나가사키(長崎) 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형형색색의 카스테라들 앞에서 뭘 사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주인 할아버지가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온 할아버지의 손에는 그냥 카스테라와 녹차 카스테라 한 쪽, 그리고 한 잔의 보리차가 들려 있었다. 덕분에 이국에서 온 청년은 느긋하게 카스테라를 시식하며 뭘 사갈지 고민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어느덧 폐점 시간이 가까웠으니, 초콜라떼 한 상자를 사간 그 청년은 아마도 그날의 마지막 손님이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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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년의 전통을 가진 쇼오켄의 초콜릿 카스테라 "초콜라떼".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우유와 함께 다음 날 아침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사진 속의 칼슘 우유만큼 맛있는 우유를 맛본 적이 없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카스티야 왕국에서 온 과자

일본 음식들 중에는 오랜 대외 개방의 역사가 묻어 있는 것들이 몇 있다. 돈까스, 카레라이스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중에서도 나가사키의 카스테라는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가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양 상인들과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조총이나 갑옷 같은 상품뿐만 아니라 천주교나 음식을 비롯한 각종 문화가 일본으로 들어간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다. 본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는 각각 비스코쵸biscocho나 파오델로pao-de-lo 라고 불리는 스폰지 케이크가 있는데, 이들 또한 이를 계기로 일본인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서양 과자의 맛을 본 일본인들이 이 신기한 과자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서양 사람들은 "카스티야의 빵(Pao de Castela)" 이라고 대답했다. 서양 혈통의 일본 과자, "카스테라"의 시작이다.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 16세기의 스페인 왕국은 아라곤, 카스티야, 나바레 등의 여러 왕국이 통합된 지 얼마 안되는 상황이었다. 일본에 천주교를 전파한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르도 흔히 스페인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나바레 왕국 출신이다. 그림은 1210년의 이베리아 반도. http://en.wikipedia.org/wiki/Kingdom_of_Castile

나가사키는 전국시대 이후 오랫동안 서양과의 교역이 성한 무역 도시였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광저우 - 마카오 -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삼각 무역로는 유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많이 왕래했고, 아예 주저앉아 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스폰지 케이크를 만드는 기술은 나가사키에 뿌리를 내렸다.

사각사각 씹히는 맛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왕 나가사키에 온 마당에 잔뜩 먹어보리라 마음 먹었다. 첫날 나가사키 관광을 마치자마자 미리 보아 둔 카스테라 집으로 달려갔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서로 다른 카스테라를 두 상자나 사서 왔다. 맛은 조금씩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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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분메이도(文明堂)의 가이엔타이(海援隊, 해원대) 카스테라. 사카모토 료마는 나가사키에서 카스테라를 먹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것은 당시의 레시피로 만든 것이다. 본래 판매하지 않았지만 드라마 이 대성공하면서 한정 판매하고 있었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우선 전체적인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촉촉하고 부드러워 스폰지 같은 느낌이 난다. 듣자니, 밀가루를 다루는 방법이나 오븐에서 굽는 방법이 조금 달라 손이 좀 간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위아래의 맛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 포장을 뜯으면 카스테라 위쪽은 고소한 계란 맛이 많이 나지만, 아래쪽으로 갈수록 바삭바삭한 설탕 결정이 씹혀 단맛이 짙어진다. 가장 큰 차이는 맨 아래. 종이와 빵 사이에는 자라메(ざらめ)라고 하여, 쌀알 두세 개 만한 직사각형 모양의 설탕 결정이 깔려 있다. 나가사키 카스테라만의 특징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맛이 한결같을 수가 없다. 카스테라가 지금처럼 대중화된 것은 일본경제가 크게 성장한 2차 세계대전 이후이고, 그 전에는 상류층이나 나가사키 근방에서나 먹는 것이었다고 한다.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맛이 조금 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나가사키 역 바로 앞에 "분메이도" 분점이 하나 있었다. 나가사키 곳곳에 많은 지점을 가지고 있는 백년 전통의 카스테라점이다. 여러 종류의 카스테라 중에 백년 전의 레서피로 만든 카스테라가 눈에 띄었다. 한국으로 가져와서 먹어 보았는데, 과연 맛이 달랐다. 단맛과 촉촉함이 약간 덜해서 좀 더 "빵" 을 먹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각종 조미료에 찌든 현대인들과 다른 옛날 사람들의 단백한 식생활이 반영된 것이리라.

일본을 다녀오는 모든 분들께 추천

카스테라는 어느덧 일본 공항의 면세점에서도 많이 파는 메뉴가 되었지만, 의외로 일본을 다녀오는 분들 중에 이걸 모르고 지나치시는 분이 많다. 그저 한국의 카스테라와 비슷하겠지 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꼭 먹어 보기를 권한다.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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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카스테라. (출처: flickr@)

필자가 일본에 갈 때 꼭 가는 곳이 있다. 박물관과 초밥집이다. 앞으로는 카스테라 빵집도 추가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