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원정과 수도원 운동

교황청은 1050년에 이르기까지 별 볼일 없는 존재였지만,

수도원 운동 이후 이후 급부상하여 십자군 원정을 주도한다.

김태권의 3권, 프레시안 단독 연재

김태권 화백의 십자군 이야기가 연재 재개됐군요. 일단 예전에 단행본으로 나온 내용의 요약본이 올라간 모양인데, 여기에 맞춰 오래 전부터 쓰려고 했던 글 하나 올려 보려고 합니다. 십자군 전쟁의 뒷배경 이야깁니다. 만화에서도 언급이 되긴 했습니다만 너무 간략하게 나와서, 독자분들이 모르고 넘어가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저자분은 연재하느라 바쁘실 테니, 저같은 사람이 대신 보충을 하는 게 좋겠지요 – 그래도 괜찮다면.

예, 단행본에서 세 쪽인가 이렇게 나왔을 겁니다.

교회권과 세속권

중세 시대 서유럽 사람들의 삶을 규정했던 권력은 두 갈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속세의 국왕이나 영주 등 기사 계급의 권력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기독교(=가톨릭) 사제들의 권력이었죠. 전자가 현실적인 무력을 보유했다면 후자는 정신적인 부분을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중세 초기, 종교적 권력은 세속의 권력에 상대가 되질 못했습니다. 오히려 얹혀 사는 상황에 가까웠지요. 예나 지금이나 가톨릭 교회 조직의 우두머리는 로마 교황청입니다.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지배하던 로마 교황청은 실질적인 무력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 왕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주고 대신 그가 지닌 무력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무력은 없었지만, 로마 제국의 후계자라는 칭호를 줄 정도의 정치적 권위는 있었거든요.

물론 이것이 공짜는 아니었습니다. 독일 국왕을 비롯한 세속의 국왕들은 대신 주교 서임권을 차지할 수 있었지요. 각 교구를 책임지는 사제를 지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겁니다. 이것이 유용한 이유는, 교회 조직을 통치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왕들은 사사건건 대드는 영주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정비된 행정 조직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곳곳으로 뻗어 있는 교회 조직은 행정 조직 대신 사용하기 딱 좋았습니다. 게다가 주교는 자식에게 상속해 주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 데다가 교육도 잘 받았기 때문에, 관료로 부리기엔 딱 맞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부하를 영주로 임명해 놨더니 그 영지를 물려받은 아들, 손자는 충성심이 시원찮더라… 이런 문제를 겪을 걱정이 덜하다는 것이죠.1 11세기에 이르면 국왕이 주교를 지명하는 수준을 넘어 주교 임명식까지 주재하게 됩니다.

http://www.flickr.com/photos/httpwwwactionpixsmarukocom/1979118124/

이 상황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신의 사랑을 설파해야 할 사제들이 살인을 업으로 삼은 기사들을 축복한다는 것부터가 웃긴 이야기2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종교란 정치 권력과 결탁하는 순간 타락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결탁도 아니고 아예 그 안에 적극적으로 포섭이 되어버렸으니, 문제가 안 생길래야 없죠. 시간이 갈수록 성직자들의 기강은 해이해지고 종교적인 지도 수준은 떨어졌습니다. 축첩이나 매관 매직 따위는 문제도 안 됐고, 성직자들은 일자 무식에 무능했습니다. 성직은 각 가문들의 재산 축적 도구가 되어 이리저리 굴러다녔습니다. 한마디로 막장 테크를 탄 거죠.

수도원 운동과 신의 평화

그렇다면 교황청은 여기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그런 거 못 했습니다. 기본적인 인사권부터 없는데 무슨 대응을 하겠습니까? 아니, 교황청도 막장 테크를 타긴 마찬가지였습니다. 10세기 초까지만 해도 교회 조직의 우두머리 노릇을 해야 할 교황은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대강 결정되는 게 통례였습니다. 955년에 18세의 나이로 교황이 된 요하네스 12세 같은 경우는 간통 현장에서 여자의 남편에게 살해당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으니 할 말 다 했지요.

성직자들의 타락에 대한 대응으로, 10세기 프랑스에서는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개혁 운동이었지요. 이 운동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운동이 역점을 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성직자의 금욕과 성직 매매(Simony) 금지, 그리고 교황권의 확립으로 인한 성직자 사회의 기강 일신이였지요. 교황이 제대로 인사권을 행사하지 않는 한, 타락은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2008년의 클뤼니 수도원. http://www.flickr.com/photos/sacred_destinations/2548044516/

수도원 운동과 함께 퍼져나간 것이 신의 평화 운동입니다. 당시 법 제도에는 페데(Fehde)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이 혈연이나 친구의 도움을 빌어 스스로 조치를 강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쉽게 말해서 “법정 밖에서 맞장 떠” 정도 됩니다. 강력한 공권력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항상 문제가 되었습니다. 기사들 사이에서 토지 분쟁이 끝이 없었거든요. 기사 계급 재산의 근원이 토지인 데다가 재판이 오래 걸리는 탓도 있어서, 페데는 아주 광범위하게 행해졌습니다. 시비가 벌어진다 싶으면 군대 동원해서 정면대결을 한 거지요.

문제는 권리가 진짜 침해된 것인지, 아니면 남의 것을 뺏겠다고 설치고 있는 건지 알 길도 없었다는 겁니다. 페데가 있는 한, 귀족들 사이의 전쟁이 계속되고 치안은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피해를 보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었죠. 신의 평화 운동은 여기에 대한 해결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올바른 질서’

11세기 중반 이후 레오 9세를 비롯한 일련의 개혁 교황들은 수도원 운동에서 제시된 개혁 조치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성직자의 부도덕한 행위와 성직 매매 행위 등을 금지하는 한편, 교황 선출에 대한 법률을 확정하여 외부의 간섭을 차단했습니다: 교황 선출권을 추기경들에게 주고, 교황 유고시 각종 정책을 차질 없이 수행토록 한 것이죠. 이에 따라 교황의 권력은 막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 정책을 실행했던 교황청 관료 그레고리우스는 훗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 ~ 1085)가 됩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전의 교황들과는 달리, 교회가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확립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속의 국왕이나 황제 따위는 교황에 복종하고 세상을 복음화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3이죠. ‘올바른 질서 수립’의 일환으로, 그는 이교도를 상대로 한 많은 전쟁들을 축복하고 지원했4습니다. 그리고 그의 수제자 우르바누스 2세는 여기에 한층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동방으로의 십자군 원정은 바로 이 사람의 손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외부와의 투쟁은 내부를 결속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즉, 십자군 전쟁을 벌임으로써 대립하던 세속의 군주들을 교황권의 아래에 둘 수 있습니다. 또한 싸움을 업으로 삼은 기사들을 대대적으로 해외로 내보냄으로써, 서유럽 안에서는 신의 평화를 확립5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밖으로는 교황권이 미치는 영역을 넓힐 수 있었구요. 정리하자면, 십자군 원정이란 당시 교황청에 있어 일종의 꽃놀이패였던 것이죠.

그런데 제가 왜 무기나 갑옷하고는 관련도 없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느냐면요…

…이게 기사단(Orders of Knightshood) 조직 탄생의 배경이 되거든요. 예, 바로 아래 사진의 친구들 말입니다.

http://www.flickr.com/photos/8765199@N07/5052453133/

to be continued…

참고문헌

참고한 책이 많지만, 일일이 적을 수가 없어 주요한 것 세 권만을 적는다. 특히 앞의 두 권은 훌륭한 서양사 개설서로 추천할 만 하다.

Judith G. Coffin, Robert C. Stacey, Robert E. Lerner, Western Civilizations (15th ed), W. W. Norton, 2005

: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서양사 개설서. 국내에는 소나무에서 번역판이 나와 있다. 하지만 최신판을 번역한 것같지는 않다.

심재윤, 서양 중세사의 이해, 선인, 2006

John Keegan, A History of Warfare, Vintage, 1994

(유병진 역, , 까치, 1996)


  1. 이에 관련해서 독일 국왕(=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실시한 정책은 제국 교회 정책이라 불린다. 교회 영지에 세속의 백작 영지와 같은 권리 – 관세권, 주조권, 시장 설치권 등등 – 를 쥐어 주는 방식으로 아예 국왕의 지배 아래에 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한 오토 1세는 “대제” 라 불린다. 

  2. 노르만 기사들이 잉글랜드 군을 격파한 헤이스팅스 전투(1066)에서도, 노르만 주교들은 승리자인 노르만 기사들에게 자신이 죽인 자에 대해서는 1년의 기도와 금식, 다치게 한 자에게는 40일간의 기도와 금식을 명했다. 현실이야 어쨌건, 칼 들고 사람 잡는 건 죄악이었던 것이다 

  3. 이렇게 세속적인 권력마저 교황권의 휘하에 두려고 한 정책을 교황 군주 정책이라고 한다. 

  4.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사실상 십자군의 제창자라고 할 수 있다. 단, 그가 제창한 십자군은 우르바누스 2세의 십자군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5. 실제로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 소집 직전, 신의 평화 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이를 확대시킬 것을 천명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 싸우고 싶으면 해외로 나가서 기독교의 대의를 위해 싸워라.” 는 말 되겠다. 

4 thoughts on “십자군 원정과 수도원 운동

  1. 흠. 전 저 만화가 별로 마음에 안들더군요. 너무 현대 정치와 얽어매려는 거 같아서….

    • 좀 그런 면이 없지는 않더군요. 저도 그 부분은 좀 아쉽다 생각합니다.

  2. 동쪽으론 십자군을 보내 약탈하는 한편, 서쪽으로는 순례자를 보냈죠.

    이 순례자들이 들르는 교회에서 돈을 써댔고, 교회는 보다 많은 순례자들을 모으기 위해 교회를 증축하는데, 이게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발전을 불러왔죠.

    • 아… 그런가요? 건축사는 잘 몰라서… 좀 찾아봐야겠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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