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를 위한 변명
핸드폰을 고치러 LG서비스 센터에 갔다가,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서 레이디 경향을 뽑아들었1다. 마광수 교수가 기고한 에세이가 실려있었다. 자기가 가진 예술론에 대해서 풀어 쓴 것이었다. 자기 성적인 판타지의 중심인 길다란 손톱에 대해서부터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가 초반부터 흥미진진했다. 글 막판에 가서는 "이러이러한 야함은 아름답다. 저러저러한 야함은 아름답다" 는 식의 열거법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지극히 마광수다운 글이었다 - 덜 것도 더할 것도 없이.
<즐거운 사라>로 긴급체포된 전력으로 유명한 마광수 교수는 상당히 독특한 예술관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예술의 창작원천이 일종의 성적 관능미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의 시각예술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영화의 경우는 어떤 영화가 됐던간에 실제로는 관능미에 대한 관음증적인 집착이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도 자기 소설들은 자기가 찾는 야한 여자가현실에 없어서 일종의 대리만족으로 쓴 것이라고 할 정도다. 에세이에만 그렇게 쓴 게 아니라 이걸 가지고 문학 이론서까지 낸 걸 보면 대단히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주장이 환영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사회 전반이 그에게 지극히 적대적이라고 하는 게 사실에 맞다. 그는 야한 소설쓴 죄로 긴급체포를 당했고 교수답지 못한 교수로 툭하면 비난을 받는다. 같은 학교 국문과 안에서도 친구가 없다고 한다. 그의 죄는간단하다. 윤리적이지 못한 저작물을 생산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는 사회 어디에서도 맛이 간 사람 취급을 받고 따돌림을 당한다.
마광수 교수의 이론이 어떠한 평가를 받는지,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가 사회적으로 욕을 먹고 왕따를 당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윤락녀가 몇 명인지 아는가. 내 기억에 공식 통계로 약 50만 명, 시민단체 주장에 의하면 200만 명은 된다2고 한다. 우리 나라 인구가 4천만이니까 여성을 절반인 2천만으로 보면, 한국은 그야말로 윤락의 왕국이다. 이런 식으로 놓고 보면 마광수에게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정말 한 줌도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어디 한 줌 뿐이던가. 비난하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말과 행동이 다른 찌질이에 불과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찌질이들이 이렇게 설쳐댈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윤리라는 방패 뒤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윤리는 전 사회에 걸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범인만큼, 이것하고 정면 대결할 만큼 배짱 좋은 사람은 없다. 찌질이들은 이것을 이용한다. 윤리의 잣대를 들이밀어 다른 사람을 나쁜 놈으로 몰아 붙이고, 왕따놓고 괴롭힌다3.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늑대를 다구리 치는 격이다.
학교에서 우리는 도덕/윤리란 결국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규범이라고 배운다. 이론적으로는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실에서 윤리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 대다수의 찌질이들이 다른 이를 욕하고 우월감을 느낄 수 있도록 숨을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 그런 점에서, 윤리 도덕이란 비겁한 자들에게 사랑받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진짜 "된 인간"들은 윤리 같은 것 없어도 인격의 향기를 풍긴다.
마광수 교수에게 비난받아야 할 점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윤리의 뒤에 숨어서 찌질거리는 군상들에 비하면 백 배는 나은 사람이다. 윤리의 방패 뒤에 숨지 않고 살 수 있는 용기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닌 것 같다.
ps) 재미있는 것은 마광수 교수의 취향. 기이하게 늘어진 배꼽걸이나 코걸이 같은 페티시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우리나라에서는 그 존재조차 모르던 시절부터 외국 잡지를 뒤져가며 공부했다고. 모든 점에서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 나간 사람이아닐까.
ps2) 위 사진들은 현재 미디어 다음에서 인터넷 전시중인 마광수 교수의 그림들이다. 달린 리플의 대부분은 마광수 교수를 동정하는 내용이다. 그를 미친 사람으로 매도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가 긴급 체포되던 시절에 비하면 세상이 조금이나마 바뀌었다는 증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