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디아블로)외모 논란 중 가장 미친거 같은 캐릭터.jpg

요즘 디아블로 4의 팔라딘 캐릭터가 흑인인 게 너무 억지스럽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더군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캐릭터 설정입니다. 흑인 성기사는 알고 보면 매우 오래된 전통을 가진 뼈대 있는 설정이거든요.

전사 성인 (Warrior Saint)

기독교에서 신앙이 깊어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합니다. 종교 개혁 이후에 성립한 개신교에서는 성인 문화가 없습니다만, 역사가 오래 된 천주교나 동방 정교, 성공회는 성인을 공경하고 축일을 기념하는 전통이 있죠. 기독교가 주류 종교로 자리잡은 이후 대부분의 성인은 시성 절차를 통과한 직업 성직자인 경우가 많습니다만 초기 기독교에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순교한 일이 많았고 딱히 시성 절차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천주교와 동방 정교가 분리되기 전에 성인으로 추앙받은 사람들의 경우 양쪽에서 모두 성인으로 인정됩니다.

직업이 다양한 만큼 당연히 군인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전사 성인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이후에도 기독교 세계의 기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아들여졌고 지금도 군인의 수호 성인으로 인정받습니다. 이들을 묘사한 작품이 중세 내내 만들어졌기 때문에, 갑옷이나 무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주제이기도 하죠. 당대의 무구를 묘사한 사료에 매일같이 등장하는 사람이니까요.

성 데메트리오스를 묘사한 이콘. 950-1000년경 만들어진 것이다. 몸통 부분은 쇠비늘을 여럿 겹쳐서 만드는 반면 팔다리 부분은 찰갑 형태로 만드는 당대 지중해 동부 지역의 전형적인 갑옷을 보여 준다.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성 마우리시오라는 사람입니다.

이집트 성인

초기 기독교 사제 중 한 사람이었던 리옹의 주교 성 에우케리우스가 기록한 마우리시오의 행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마우리시오는 이집트 테베에서 편성된 로마 군단을 이끌던 지휘관이었다. 그가 이끌던 부대는 로마 제국의 43대 황제인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286년 갈리아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바가우다이 반란)을 진압할 때 동원되었는데, 기독교인이었던 그와 그의 부대는 승전 축하연에서 로마의 신에게 번제를 드리고 지역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분노한 황제는 군단에 십분의 일형을 선고하였으나, 오히려 더 많은 병사들이 마우리시오를 따라 황제의 명을 따르길 거부하였다. 결국 황제는 성 마우리시오와 두 부관(성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와 성 칸디두스(Candidus)), 그리고 6천여 명에 이르는 전 군단병을 아가우눔(지금의 스위스 생-모리스)에서 살해하였다.

지금 사람들의 눈에는 좀 이상해 보입니다만, 이집트는 지금도 기독교인이 많은 지역이고 당대 로마인들은 국경 안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면서 살았기 때문에 나일 강 상류에서 편성된 부대가 머나먼 스위스까지 오는 것이 이상하지만은 않습니다. 구약성서에도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이야기가 나오고 사도행전에도 에디오피아 내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기독교 세계와 이집트, 수단, 에디오피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으니까요.

이 이야기는 150년 정도가 지난 뒤 기록되었고1, 성 마우리시오는 그 근방 지역에서 널리 공경되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성상도 여럿 만들어졌는데, 오랫동안 평범한 백인으로 묘사되어 오던 성 마우리시오는 13세기 중반부터 갑자기 흑인으로 묘사되기 시작합니다.

흑인 성기사

성 마우리시오를 묘사한 사암상. 독일 마그데부르크 성당에 있는 것으로, 이 성당의 공식 명칭은 '성 마우리시오와 성녀 카탈리나 성당'이다. 1250년경 만들어진 이 작품은 성 마우리시오를 흑인 모습으로 묘사한 최초의 작품이다 - 이후 성 마우리시오를 묘사한 작품들은 이 작품을 따르게 된다. 갑옷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작품인데, 13세기의 coat of plate를 묘사한 최초의 유물 중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출처: reddit)

사실, 성 마우리시오가 흑인이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일 강 상류는 수단과 가까운 곳이고, 중세 유럽에는 에디오피아와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도 딱히 틀린 게 아니긴 하지만요. (좀 새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이 지역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어난 왕조이집트를 통치한 적도 있습니다.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 중에 흑인 파라오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13세기 중반부터 독일 지역에서 마우리시오를 흑인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프랑스나 이탈리아 북부 같은 곳에도 마우리시오를 기념한 성상이 많이 있지만 이 쪽은 백인으로 묘사합니다.

나름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기는 한데, 이 시기 독일 왕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근거지가 시칠리아였다는 점입니다. 시칠리아는 11세기 기독교 세력에 의해 탈환되기까지 약 200년간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흑인 인구가 조금 살고 있었고, 황제가 이끌고 다니던 무슬림 친위대에도 흑인 병사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당대의 예술가들이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성 마우리시오를 흑인으로 묘사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합니다.

어쨌거나 이후 독일 지역에서는 최신 갑옷을 입은 흑인 기사를 묘사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고, 이는 르네상스 시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당대의 무구를 잘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만들어진 시기 또한 명확하기 때문에 갑옷의 발전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기준점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성 마우리시오를 묘사한 제단화. 1520–25년. 16세기 전반, 독일 남부에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필드 아머와 투 핸디드 소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중세 유럽에서 흑인을 직접 볼 기회가 있던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만, 성 마우리시오 외에도 흑인은 머나먼 이국 사람을 묘사하거나 보편성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로서 자주 묘사되곤 했습니다. 디아블로 2에서 성기사가 흑인으로 묘사되거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 흑인 기사가 등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팔라딘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흑인이었으니 이제 와서 논란이 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이거 가지고 시비 거는 친구들은 디아블로 처음 하나?

3명의 동방 박사가 예수의 탄생에 대한 계시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중세의 수서화.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동방 박사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없지만, 이 그림에서와 같이 청년 - 중년 - 노년의 세 남자로 묘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는 청년은 명백한 흑인으로, 중년은 중근동 백인으로 묘사되었다. (출처: The Salzburg Missal, Vol. 1, c. 15 Century, BSB Clm 15708, f. 63.v)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 등장한 흑인 기사. 전형적인 북아프리카인으로 묘사되었고 갑옷도 거기에 맞춰서 입고 나왔다.


  1. 당연히 에우케리우스도 두 다리쯤 건너서 들은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