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몰락의 시작, 콜트레이크 전투(Battle of Kortrijk, Battle of the Golden Spur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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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불길
불만에 가득 찬 플랑드르 인들에게 반란의 불을 붙인 인물은 피터Pieter de Coninck라는 직조공이었다. 평민에 불과했지만 유창한 언변과 사람을 모으는 재주를 지닌 피터가 주위의 가난한 직공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자 이를 위험한 선동자로 봤던 겐트 시 의회는 1301년 6월 피터를 투옥한다.
이렇게 되자 겐트 시 평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평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피터를 감옥에서 구출하고 도시를 장악했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플랑드르 총독 자크 드 샤틸롱Jacques de Châtillon은 군대를 보내 반란군을 해산시키고 프랑스 국왕이 약속한 감세를 취소했지만 덕분에 사태는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샤틸롱은 나름대로 플랑드르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한 일이었겠지만 더 내려야 할 세금을 원상 복귀시킨 것이었으니 결과적으로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 전 백작 귀의 아들인 장John of Namur이 끼어들면서 사태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전쟁에서 아버지와 형과 함께 투옥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 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민심이 프랑스에서 떠나자 그는 복수를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1301년 12월, 장은 피터와 그 일당들을 브뤼주로 불러 전격적으로 의회를 접수하고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윽고 그들은 겐트로 진격, 귀족들을 쫓아내고 겐트 시 역시 점거했다.
브뤼주의 금요일
이쯤 가고보면 피터와 그 일당을 말썽꾸러기 무법자 정도로 생각했던 샤틸롱 역시 사태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정작 샤틸롱이 행동에 나선 것은 5월이 되어서였다. 샤틸롱이 파견한 프랑스 군대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겐트 시로 파견되자, 워낙 무력이 딸렸던 반란군은 다시 브뤼주로 내빼는 신세가 되었다.
이윽고 샤틸롱이 이끄는 800여 명의 군대(120명의 기사를 포함한)가 브뤼주에 이르렀다. 반란군과 정규군이 직접 맞붙으면 도시가 쑥밭이 될 것은 당연한 일, 겁먹은 브뤼주의 시민들은 반란군들을 나가게 하고 프랑스 군의 입성을 받아들였다. 1302년 5월 17일, 샤틸롱의 군대는 브뤼주에 입성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약속과는 달리 샤틸롱이 엄청나게 중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온 것이다. 샤틸롱의 중무장한 군대는 브뤼주의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안기기에 충분했고, 이러다간 반란에 협조한 대가로 피벼락을 뒤집어쓸 판국이라고 생각한 브뤼주의 시민들은 선공을 날리기로 결심했다 - 쫓겨난 반란군에게 사자를 보내 도시에 있는 프랑스 군을 발라 버리자는 제의를 해버린 것이다!!
이튿날인 5월 18일 금요일 아침, 브뤼주의 시민들은 곤히 자고 있는 프랑스 군대를 습격하여 수백여명을 죽이고 90여 명의 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샤틸롱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이 일을 계기로 플랑드르 전국에서 반란이 터져나왔다. 반란군은 전 플랑드르 백작 귀의 손자이자 작위와 영지의 정당한 계승자인 윌리엄William of Jülich을 새 백작으로 추대하고, 각 도시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민병대Militia와 백작에 충성스러운 소수 기사들을를 소집, 군대를 구성했다. 돈 많은 브뤼주 시가 여기에 들어가는 엄청난 돈을 담당했다. 기세가 오른 반란군은 거침없이 플랑드르를 휩쓸며 귀족들과 프랑스 군을 쫓아냈다. 카셀Cassel 성이나 콜트레이크 성과 같은 몇몇 요새만이 반란군에 저항하는 형편이었다.
1302년 6월, 드디어 로베르Robert of Artois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이 플랑드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다. 프랑스 본토와 플랑드르를 잇는 요충지인 콜트레이크 성을 공격중이던 반란군과 프랑스의 응원군이 1302년 7월 11일 충돌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