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몰락의 시작, 콜트레이크 전투(Battle of Kortrijk, Battle of the Golden Spurs) #5

도륙

프랑스 군의 기사들이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플랑드르 군 대열에 부딫혓지만, 속도를 낼 만큼 충분한 거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플랑드르 군 대열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어 달려온 후미의 기사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자, 그들은 흡사 꽉 막힌 고속도로처럼 앞으로도 뒤로도 못갈 지경이 되어버렸다.

발묶인 기사는 무게중심이 흔들흔들한 보병에 불과하다. 그리고 창과 고덴닥goedendag으로 무장한 플랑드르 군의 진짜 보병들은 “박차(spur)를 가진” 보병들을 말 위에서 끌어내 하나씩 때려죽이기 시작했다.

플랑드르 전통의 타격무기, 고덴닥. 1미터 반 가량의 몽둥이에 커다란 바늘이 달린 값싸고 흔한 병기이다. 흔히 풋맨즈 플레일과 고덴닥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널리 퍼진 오해이다. 양자는 타격병기라는 공통점 외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어 프랑스 군의 우익도 공격을 개시했으나, 이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개천을 건너느라 대열이 흐트러지고 충분한 돌격거리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은 보병대열을 돌파하지 못했다. 프랑스 군의 중군이 플랑드르 군의 중군을 격파할 뻔 했으나, 후미에 대기하고 있던 이프르의 민병대가 달려오는 바람에 밀려나고 말았다.

원군의 공격이 시원치 않음을 눈치챈 콜트레이크 요새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와 플랑드르 군의 후미를 치려고 했으나 이프르의 민병대는 이들 역시 쉽게 쫓아 버렸다.

프랑스 군으로서는 진짜 난감한 사태가 그 다음에 벌어졌다. 프랑스 군의 돌격이 저지된 것은 물론이요 곧 쫓겨 올 사태를 감지한 총사령관 아르투아 백작이 직접 근위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장고 끝에 악수라고, 얼마 안되어 그 또한 말에서 끌어내려져 짓이겨진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총사령관이 전사하자, 프랑스 군은 전투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전투 종결

피비린내나는 살육은 세 시간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플랑드르 군은 유럽 최강의 프랑스 기사들을 패배시켰다. 프랑스 군의 패잔병들이 전장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플랑드르 군이 10km 밖까지 쫓아가 패잔병들을 살해했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간 프랑스 군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기록적인 것이었다. 프랑스 군의 피해는 막대하여 총사령관 로베르 등을 비롯해 전사한 영주급 인사는 60여 명이나 되었고 일반 기사도 수백여 명이 죽었다. 천여 명이나 되던 견습 기사(squire)들은 거의 전멸했다.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전리품 회수를 위해 전장을 점검한 플랑드르 군대는 황금 박차만 500여 개를 챙길 수가 있었다. 콜트레이크 전투의 또다른 이름인 “황금 박차의 전투(Battle of the Golden Spurs)”도 여기서 나왔다. 당시에는 정식 기사만이 황금 박차를 사용할 수 있었고 견습 기사들은 기껏해야 은 박차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시 전쟁에서 가장 돈이 되는 물건인 갑옷도 수천 벌을 챙겼으니, 그야말로 중세 최고의 횡재였다.

역사의 이정표

하지만 이것이 곧 기사의 몰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군사제도는 그 효율성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득권 등의 영향도 크게 받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병이 기병을 한 번 이긴 걸 가지고 보병을 군대의 주력으로 삼고자 하는 봉건 군주도 없었고, 설령 그랬다고 한들 기득권 세력인 기사들의 반발 – 군주 밥그릇 치워 버리기 딱 좋은 – 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제도 미비로 인해 대규모 보병 상비군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시기상조인 시대였다는 점도 한 몫 했다.

게다가 기사 자체가 여전히 강력한 존재였다. 콜트레이크 전투의 승리에는 수비측에게 유리한 지형과 프랑스 기사들의 방심이 큰 몫을 했다. 장창과 타격 병기로 무장한 민병대들에게 기사란 여전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훗날 벌어진 전투에서 플랑드르 민병대가 프랑스 기사들에게 크게 패한 것도 몇 번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콜트레이크 전투 이후 벌어진 백년전쟁에서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기사들은 전장을 주름잡던 주역이었다. 말탄 기사들의 힘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위해서는 화약이 사용되기 시작한 백년전쟁 말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백년 전쟁 말기의 미늘창병Halberdier

하지만 이 전투는 “정렬된 보병의 밀집 대형으로 기사를 격파할 수 있다.” 는 것을 증명한 중세 최초의 전투들 중 하나로 기억되며, 훗날 다가올 시민들의 시대를 예견한 사건으로도 의미가 깊다. 덧붙여, 이 전투의 승리로 지금의 플랑드르 일대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은 감소되었고 훗날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공국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참고문헌

[De Liebaart]

: 콜트레이크 전투를 기념하는 웹사이트. 네덜란드 어와 영어를 지원한다. 본문의 병력구성 및 배치, 전투 부분은 이 웹사이트를 참조한 것이다.우리나라로 치면 한산도 대첩 기념 웹사이트 정도 되기 때문에, 플랑드르 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정을 강조하고 있다. 담고 있는정보의 양과 깊이에 있어서 인터넷 강국이라고 입로만 떠들어대는 어느 나라와는 확실히 수준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위에서고덴닥의 사진도 이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역사 웹의 모범이라 할 만한 사이트.

– <용병의 이천년사>, 기구치 요시오(傭兵の二千年史, 菊池 良生)

: 유사 이래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인 용병의 변화사에 대한 책. 다만 일본 책인 만큼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의 표기에 약간 난감하다. 국내판은 없으며, 디펜스 코리아에 작성한 축약 번역본이 올라와 있다. (링크를 못찾겠어 젝일 -_-)####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 Battle of the Golden Spurs, Kortrijk, Count of Flanders

: 두말할 필요가 없는 세계 최대의 인터넷 백과사전. 역사적인 전투에 대해서는 일정한 포맷으로 정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제 무엇이든 참조하기 좋은 사이트.#### – [Traces from the past]

: 동전, 저울추, 가위 등 각종 중세의 잡다한 골동품을 판매하는 곳.#### – [The Maskukat Collection]

: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동전들

4 thoughts on “기사몰락의 시작, 콜트레이크 전투(Battle of Kortrijk, Battle of the Golden Spurs) #5

    • 예, 네덜란드 어가 독일어하고 가까워서 비슷한 의미라고 들었는데 저도 정확한 것은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1. 그러고보니 필립 4세는 정말로 리얼 기사킬러, 이미 17살때부터 16000명의 기사를 아라곤 십자군에서 말아먹고, 황금박차의 전투에서 2500기사와 2500견습기사를 학살하고,
    콜트레이크 전투에서의 패배로 돈이 궁해지자 기사 서임직을 대놓고 파는것도 모자라서 사달라고 간청까지하며 기사들의 자존심을 죽이고, 기사 서임직을 팔아도 돈이 모자르자 템플기사단을 범해버린 진정한 기사들의 주적.

    •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이 인물을 통사적 시점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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