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군기, Oriflamme

전략 게임 Medieval 2: Total War를 하다보면 프랑스 국왕의 근위대만 빨간 깃발이 하나 더 있는 걸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유닛들이 파란색이라 더 눈에 잘 띄는 이 깃발, 아닌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군기를 재현한 것이다. 바로 프랑스 국왕을 상징하는 태양의 군기, Oriflamme이다. 라틴어로는 “황금의 불꽃”이라는 뜻이다.

기원

Oriflamme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은 1124년이 최초로 알려져 있는데, 이 깃발의 기원이 더 오래되었다는 주장들이 많다.

하나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서기 800년에 교황 레오 3세에게서 받은 Montjoie라는 군기가 Oriflamme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Montjoie의 생김새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Montjoie를 Oriflamme이라고 칭하는 기록들은 꽤나 후대의 것이다. 프랑스 카페 왕조의 창시자 휴그 카페(987-996)가 꼬리가 달린 빨간 깃발을 사용했다고 전해지지만, 여기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

885년 노르만 족이 파리를 포위했을 때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빨간 군기가 Oriflamme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Oriflamme인지는 잘 모른다. 까놓고 말해 전쟁터에서 제일 흔한 군기가 빨간색 군기다. 빨간색은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심지어 혹자는 이 깃발의 기원을 고대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로까지 소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 신빙성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옛 깃발을 흉내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 정도는 있겠다.)

Pierre-Henri Revoil의 그림에 묘사된 Oriflamme. 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이다.

비교적 확실한 것은 이것이 본래 왕의 깃발이 아니라, 파리 북쪽에 있는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의 깃발이라는 점이다. 중세 유럽에서 교회는 특별한 권위를 가진, 일종의 관청 비슷한 존재였다. 귀족들의 영지로 편입되지 않은 마을들을 왕 대신 다스리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었는데, 교회 혹은 교구를 상징하는 깃발은 힘 있는 귀족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주민들을 조직하는 등의 일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가 있었다. 따라서 많은 수도원들과 교구들이 스스로를 상징하는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위에서 언급한 1124년의 기록에 의하면 생드니 수도원이 위치한 Vexin 백작령에서 Oriflamme을 사용했다고 한다. 1077년 이후 프랑스의 국왕은 Vexin의 백작을 겸하였는데, 아마도 필리프 1세(Philippe I, 1060-1108) 좀 더 확실히는 루이 6세(Louis VI, 1108-37)의 시기에는 Oriflamme이 프랑스 국왕의 군기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필리프 1세의 신하로서 루이 6세의 대신을 지내기도 했던 생드니 수도원의 원장, 쉬제Sugar의 야심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수도원(그때까지는 그저 One of 수도원이었을 뿐이었다)과 프랑스 왕가를 적극적으로 연관시키고자 했는데, 생드니 수도원은 이후 프랑스 왕들의 묘소Royal Necropolis로 사용되었으며 프랑스 왕가의 역사책인 Grandes Chroniques de France의 집필을 담당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로 치면, 사관(史官) 역할을 했다고 해야 할까.

모습

Wikipedia에 올라온 Oriflamme 이미지. 아마도 이것과 비슷하게 생겼으리라 생각되지만, 순전히 상상이다.

“이것이 Oriflamme이다.” 라고 정확하게 묘사된 사료 자체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Oriflamme의 모습 또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Oriflamme을 묘사했다고 생각되는 당대의 사료들도 그 묘사가 제각각이라,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중세의 책에 묘사된 삽화들은 고증에 그리 신경을 쓰지도 않을 뿐더러1,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전장을 실제로 보고 그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많은 중세의 그림들이 “길게 꼬리를 늘어뜨린 – 꼬리의 수는 꽤나 다양하지만 – 빨간 깃발” 을 묘사하고 있으며, 몇몇은 금색 테두리나 금색 별이 그려져 있어 대략의 생김새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기야 원본은 생드니에 그대로 두고 복제품을 전장에 들고 나갔다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깃발을 수리해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이렇듯 모습이 조금씩 다른 것도 이해가 간다.

Oriflamme은 가로로 길다란 깃발로 묘사될 때도 있고 세로로 길다란 깃발로 묘사될 때도 있는데, 19세기에 그린 그림에는 후자와 같이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Medieval 2: Total War에 묘사된 Oriflamme은 이러한 설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세 프랑스의 국왕들은 전장에 나갈 때 이 군기를 가지고 가기 위해 생드니에 들르곤 했다. 이 기를 드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기에 기수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 경우도 많은데, 기사도에 대한 책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Geoffroi de Charny2가 대표적인 경우다. 군기가 다 그렇긴 하지만, 이 경우에도 군기가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던 것은 물론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 Oriflamme의 기수라는 것 자체가 훌륭한 기사라는 반증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군기가 사용된 것은 15세기 말이었다. 이후에도 Oriflamme은 생드니에 남아 있었던 듯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도중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재 실물은 남아 있지 않다.

레퍼런스

[Xenophongroup – In search of Oriflamme]

  • 전쟁사 매니아들의 웹사이트. 인터넷에서 본 Oriflamme에 대한 문서 중에 가장 잘 된 문서라고 생각한다. 내용으로 볼 때 상당한 1차 사료들을 섭렵한 것으로 보인다. (무서운 거뜰…)

[Heraldica – Oriflamme]

  • 중세의 문장이나 군기 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웹사이트.

  1. 다만 무기나 갑옷의 경우에는 그림이 그려진 당대의 것을 꽤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고대 이스라엘의 전쟁을 그린 삽화에 불레셋 전사 골리앗이 중세 서양 갑옷을 입고 등장하는 대략 아햏햏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_- 

  2. 이 인물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http://en.wikipedia.org/wiki/GeoffroideCharny에서 볼 수 있다. 위키피디아, 니마들이 짱 드세효. 

13 thoughts on “황금의 군기, Oriflamme

  1.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미디블 토탈워는 어쩐지 전작 로마 토탈워에 비해 좀 재미가 없더군요. 유닛에 개성이 없다랄까… 어디를 하든 다 비슷비슷해 보이고 말이죠. 너무 익숙해 져서 그런가…

    • 워낙에 전작의 문명들이 개성발랄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천주교 문명권인 미디블2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요, 무엇보다 중세 유럽의 유닛들은 매니아들에게 너무 익숙하지 않습니까 :D

  2. 토탈워가 괜히 명작이 아니죠 흐흐

    • 정말 저런 것까지 고증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거야말로 고증의 폭풍 -_-;

  3. 아고.. 비밀번호를 쓸 뻔했네… 아무튼… 저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보다 더 재밌을 거 같은데… 오오~ 그래픽 죽음…!

    • 그건 그런데, 사실은 좀 어렵답니다. 뭐 유럽에서는 크게 히트를 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ㅋㅋㅋㅋ

  4. 잘 봤어요~
    혹시 Oriflamme의 Ori는 오리칼코스의 그 Ori인가요?

    • 글쎄요? 아마 Ori = 황금, Flamme = 불꽃 뭐 이런 뜻일 것 같은데요, 정작 오리칼코스는 그리스 어인지 라틴어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인터넷 상에는 라틴어 – 영어 사전도 많으니, 함 찾아 보시고 알아내시면 저도 가르쳐 주세요 :D

    • orichalcum, orichalci N (2nd) N 2 2 N [XXXCO]
      brass; golden metal; yellow copper ore, “mountain copper”; brass objects (pl.);

      라는군요. 밑에는 같은 뜻으로 aurichalcum이 있었으니 아마 auri가 변형돼서 ori가 된 것 같습니다. 뜻은 황금 정도일 듯?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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