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의 전사들 #1 – 4~5세기의 동북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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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고구려 열풍입니다. MBC가 광개토대왕을 모티브로 한 판타지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 에 차마 사극이라는 말은 못 붙이겠군요 - 인터넷도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극을 자처하면서도 역사적인 지식 따위는 개무시한 덕분에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오해를 심어 줄 우려도 커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강성함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강성함을 만든 고구려군이 어떤 군대였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자료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실정입니다. 중세 유럽의 기사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도 자료가 좀 있고 책도 구할 수 있는 반면, 정작 한국 역사인 고구려군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는 책도 별로 없고 인터넷에도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자란 지식이지만 제가 총대(?)를 매기로 했습니다. 내용이 좀 많은지라, 2~3일에 한 편씩 올라갈 것 같습니다. 그저 취미로 공부하는 아마추어인지라 틀린 부분도 있을 수 있으니, 보시는 분들의 너그러운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기마 민족들의 흥기
보통 이야기하는 고구려군은 여러 모로 어설펐던 초기의 군대가 아니라, 중기 이후 어엿한 정규군으로 자리를 잡은 고구려군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군대를 이해하려면 먼저 4세기 고구려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로 잘 알려진 중국의 삼국 시대는 AD 280년,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진(晋)나라 무제 사마염(司馬炎)의 천하 통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진무제는 천하통일을 위한 전쟁이 끝나자 군대를 대량으로 감축하고 아들과 조카들을 작은 나라들의 왕으로 책봉하여 독자적인 나라와 군대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위나라 말기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추구하여 공신 · 호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천자 일족을 제외한 황족들에게도 군대와 권력을 주지 않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누군가가 황제의 권력(특히 병권兵權)을 차지하는 데만 성공하면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고, 실제로 그것을 성공시킨 것이 바로 사마씨 일족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진무제는 황제가 되자 "자기와 같은 사람이 더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위나라를 거울삼아 정 반대의 정책을 실시합니다: 지방관에게 강력한 군대를 주지 않고, 사마씨 종실의 황족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고 왕으로 봉함으로써 독자적인 군대와 권력을 가지도록 하고 유사시 황실을 지키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진무제 딴에는 중국 천하를 사마씨가 영원히 차지하기 위해서 짜낸 묘안이었겠지만, 그 결과는 재앙적이었습니다. 290년 진무제의 뒤를 이은 혜제는 황제 노릇을 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고, 이에 따른 외척들의 발호와 군대를 가진 황족들의 다툼은 결국 팔왕의 난이라는 난장판으로 발전하여 장장 16년간의 내전(290 ~ 306)을 치르게 됩니다.
306년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직을 황제로 즉위시킴으로써 팔왕의 난은 끝이 났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 발생했습니다. 황위 다툼을 하던 진나라 황족들은 더 많은 병력, 특히 강력한 기병을 필요로 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북방의 흉노족과 선비족을 닥치는 대로 끌어들여 자신들의 군대에 편입시켰습니다. 후한 말기 동탁이나 여포의 기병대에서 볼 수 있듯, 중원의 군대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기병 전력을 말 잘 타는 변경의 이민족(호기胡驥)들로 충당하는 것은 상당히 오래된 관습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중원 땅에 자리잡았으면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이들에게는 강력한 통일 왕조를 구축하기 위한 사회 시스템이 없었고 또 중원 왕조가 이들을 교묘하게 분열시켜 힘을 합치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진나라의 힘은 크게 쇠약해졌고, 이를 본 오랑캐들은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중원의 전쟁에 참전하면서 발달된 사회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한족 병사들을 자신들의 군대에 편입함으로써 더욱 강력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결국 진나라를 양자강 아래로 내쫓아버린 북방 이민족들은 중국 북부를 무대로 치열한 패권 다툼을 시작합니다.
진나라의 멸망과 오호 십육국 시대의 개막 (네이버 지식in)
고구려의 팽창
4세기 전반은 고구려의 역사가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기였습니다. 졸본 지역의 여러 부족들이 연합하면서 시작된 고구려의 초기에는 자체 세력을 가진 정치집단이 다수 존재했으나, 태조왕(53~146) 이후 계루부, 비류나부, 환나부, 관나부, 연나부의 5나부로 세력이 정리되었습니다. 고구려 왕은 계루부의 고(高)씨였는데, 국가정책이 대가들이 모인 제가회의에서 결정되었을 뿐 각 나부들은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3세기 말, 나부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됩니다. 연맹 국가에서 중앙 집권 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계루부, 연나부, 비류나부로 세력이 몰렸고 관나부와 환나부는 몰락했습니다. 4세기에는 왕이 직접 전국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관료 체제가 발전하면서 각 나부의 유력 집단은 수도에 몰려 살면서 중앙 귀족으로 변해갔습니다.
전쟁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고구려 초기 나부별 병력 동원 체계는 전사계급(일명 좌식자)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으나, 4세기 전반을 즈음하여 징병제로 변화했습니다. 전쟁의 규모가 커지면서 전사계급만으로는 충분한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을 뿐더러, 각 나부의 백성들을 군인으로 징집할 수 있을 정도로 왕권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후 고구려군은 342년 전연과의 전쟁에서 5만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하게 팽창하게 됩니다.
대외 환경도 급격히 변했습니다. 고구려 초기의 전쟁상대들은 한반도 북부의 작은 소국이거나, 기껏해야 중국의 지방 군현들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중앙 집권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변 국가들도 발전했고, 결국 4세기경에는 만만치 않은 대국들과 힘겹게 싸워나가야 했습니다. 고구려의 주 상대는 건국 초기부터 사이가 나빴던 북방의 선비족과 남쪽의 부자 나라 백제였습니다. 남북의 두 강대국과 싸우는 것은 너무나도 힘겨운 것이어서 광개토대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331~371)에 이르러서는 선비족의 침공으로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포로 5만명이 잡혀가는 참패를 당하고(342), 급기야 고국원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백제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수모(371)를 당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고구려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나라의 발전된 전쟁 기술을 받아들이고 이를 발달시켜야 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강성한 고구려군은 이러한 생존 투쟁의 산물입니다.
텍스트큐브에서 작성된 비밀 댓글입니다.
아, 오타가 났네요. 환나부 → 비류나부로 정정했습니다.
지적 감사드립니다 :D
재미있고 유익한 글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다음 편도 기대할게요~~
감사합니다.
“좌식자”라는 신선한 용어가 보였는데 그만 “坐食者”로 이해하고 말았습니다. orz…
무사계급과는 정반대의 단어군요 ㅎㅎ
드라마는 싫어하지만, 이번 포스팅은 기대가 되는군요. 감사드립니다 ^^
예, 시리즈물인데 양이 좀 많아서 제 스스로가 걱정입니다.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Orz
그리고 坐食者는 그 좌식자가 맞습니다. 하호들은 일하느라 바빠서 앉아서 밥을 먹을 사정이 안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잘읽었습니다 ^ ^
다음펴도 기대가 되네요 ~~.
감사합니다 :D
좌식자가 坐食者 맞을 겁니다. 일은 안 하고 싸움만 하는 집단.. 약탈 경제(?)의 주력이었다던가요.
예, 어느 나라든 싸움질로 먹고 사는 귀족 전사가 생기고, 그 다음 전투행위가 전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게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이더라구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포스트인듯-!
ㄲㄲㄲㄲ
오나라 멸망-삼국통일은 280년이죠. 그나저나 맨 마지막 줄은 링크인 줄 알고 눌렀다가 그냥 텍스트라서 당황했어요. ^^;
아, 사마염의 진나라 황제 등극이 265년이고 삼국통일은 280년입니다. 수정했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드립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