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기병에 이어 이번에는 기마궁수입니다.

기마궁수와 기사(騎射)

기마궁수(혹은 기마궁사)란 말을 타며 활을 쏘는 병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말타기와 활쏘기의 결합으로 생각하시면 되는데,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활을 쏘는 동안 말에서 자세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등자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다리에 힘을 주어 말 몸통을 조임으로써 자세를 고정시켜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수련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기마궁수가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고대 중근동의 아시리아 제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병종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우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 이 사람들은 수렵 생활을 위해 활을 많이 사용할 뿐더러, 말 탈 때도 등자 같은 것 필요 없거든요.

도망치며 적을 쏘는 파르티아 사법(Parthian Shot)을 구사하는 아마존 전사를 묘사한 고대 그리스의 청동상. 파르티아(지금의 이란)의 경기병들이 사용하는 궁법이라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자유자재로 말을 다루며 화살을 쏘는 스키타이 전사들의 전설은 반인반마의 센타우르스 전설을 낳았다.

기마궁수는 궁병들의 집중사격에는 약했지만, 발이 빠르기 때문에 보병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보병이 밀집 대형을 이루면 중장기병조차 이를 부수기 어렵지만, 기마궁수의 지원사격이 있다면 보병들은 쉽게 밀집대형을 이루지 못합니다.1 뿐만 아니라 정찰 활동을 하거나 패잔병을 추격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습니다. 대열을 이룬 보병이 밀고 당기는 식의 전투를 했던 고대 전쟁에서 대부분의 사상자는 대열이 붕괴되어 도주하는 도중에 발생하고, 따라서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추격하여 최대한 많이 살상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중장기병은 느리고 말이 쉽게 지치기 때문에 추격전을 전개하는 데 제한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기마궁수: 기병 확보를 위한 노력

사실 고구려군에 기마궁수라는 병종이 따로 존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기마궁수들이 많이 발견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평양 덕흥리 벽화를 제외하면 전부 수렵도에 그려져 있고, 군대 행렬을 묘사한 행렬도에서는 단 1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냥을 갈 때는 말 타고 활 드는 것이 당연하니, 수렵도에 묘사된 인물들은 사냥을 하러 나온 사람이지 기마궁수라는 병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에 기마궁수가 있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데, 그 이유로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마궁수라는 병종의 유용성입니다. 기마궁수는 정찰, 적진교란, 패잔병 추격 및 섬멸 등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선비족 등의 이웃 국가들이 기마궁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유용한 병종을 고구려만 보유하지 않았다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두 번째로 고구려는 유목문명은 아니었지만, 기마궁수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 영토 안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말갈족들을 동원할 수 있었을 뿐더러, 고구려 내부에서도 충분히 동원이 가능했습니다.

평양시 덕흥리 고분벽화(408)에 묘사된 기마궁술대회. 기사 연습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기병 양성에 힘을 기울이던 당시 고구려의 시대상을 짐작하는 데 무리가 없다. 왼쪽의 기마궁수가 파르티안 샷을 날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고구려에서 사냥이란 매우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는 고구려 국왕의 사냥 기록만 23개를 전하고 있는데, 그나마 매년 3월 3일 낙랑언덕에서 행하는 정기 수렵대회는 제외한 수치입니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행사였던 것 같습니다만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대규모 사냥 대회는 말타기 연습도 되지만, 역할분담과 명령체계가 확실해야 하기 때문에 군사훈련의 역할도 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온달전은 정기 사냥대회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인 온달이 평강왕의 눈에 띄어 후주와의 전쟁에서 선봉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귀족들만이 사냥에 나간 것이 아니라 5부의 젊은이들에게 사냥 참가가 개방되었다는 것도 함께 전하고 있는데, 온달의 예로 미루어보아 사냥 대회는 일종의 무관 등용 창구로서의 기능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출세가 보장되는 길이니만큼 고구려의 젊은이들이 기사 연습에 열중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 이렇게 되면 국가 입장에서는 잘 훈련된 기병을 힘들이지 않고 확보할 수 있습니다.

  • 이렇게 놓고 보면 중장기병보다 오히려 기마궁수가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기마궁수는 중장기병에 비해 비용이 훨씬 적게 들기 때문입니다. 기마궁수란 자체 병종으로 편성되기보다 중장기병으로 진급하기 전단계의 기병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투구 및 갑옷

기본적으로 기마궁수는 기동성이 생명이기 때문에 몸을 무겁게 할 수 있는 방어구를 거의 걸치지 않습니다. 걸쳐 봐야 가죽 조끼 정도였을 겁니다. 황해도의 안악 3호분에는 갑옷을 입은 궁수가 등장하는데, 활을 쏘는 데 걸기적거리지 않도록 소매가 전혀 없는 조끼형의 갑옷을 입고 있습니다. 아마 기마궁수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 무용총 수렵도. 아마 고구려 기마궁사들의 모습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주무장 - 활

고구려의 활이 실물 발굴된 바는 없지만2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활은 현재의 국궁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의 국궁은 나무쪽에 소의 힘줄이나 민어 부레 풀 등을 발라 굳혀 만듭니다. 활대가 질긴 만큼 당기기도 쉽지 않고, 그만큼 파괴력도 강력합니다. 다만 말 위에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기가 약간 작습니다.3

화살에는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무용총 벽화의 기마궁수가 명적4을 발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여러 종류의 화살이 용도에 따라 분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살을 꽂아 놓는 시복을 차고 있는 것도 보이는데, 실물은 전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의 시복에 비해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무장 - 직도

기마궁수들도 보조 무기로 칼 한 자루 정도는 소지했을 것으로 봅니다만, 고분 벽화나 문헌 근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1. 밀집 대형에 화살을 쏘면 대충 쏴도 어딘가에는 맞습니다. 현대전에서도 보병부대를 붕괴시키기 위해 집중포격을 하죠? 포격이 끝나면 어김없이 탱크가 들이닥쳐 보병 진지를 유린하는데, 기마궁수의 엄호사격이 끝난 뒤 돌격하는 개마기병이 연상되어 재미있습니다 :D 

  2. 북한에서는 4세기경 고구려 활의 일부가 발굴되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3. 몽골 활과 한국 활을 비교해 보면 크기 빼고 거의 똑같이 생겼는데, 이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4.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 적병의 사기를 꺾기 위해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