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 스타벅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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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6일 오전 10시 7분

마카오, 세나도 광장

1.

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유럽의 것이라면 어쩐지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오픈 때부터 “가까이 있는 유럽” 이라는 모토를 내걸었는데, 실제로 정문에는 영국 근위병 모형과 바티칸 근위병 모형이 서 있다. 한국 백화점에 뜬금없이 유럽 운운하는 건 꽤 기괴한 일이지만, 고급스러운 백화점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유럽만큼이나 좋은 소재가 없다는 건 아마도 “유럽 = 고급” 이라는 느낌이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2.

그러한 유럽 문물에 대한 묘한 동경심의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다. 미국의 커피 체인점하고 유럽이 무슨 상관이 있나 싶겠지만, 스타벅스의 성공은 커피 전문점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스타벅스가 생기기 훨씬 전인 50년대부터 던킨 도너츠는 전국적으로 커피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 음료 역시 마찬가지, “에스프레소 로얄” 은 스타벅스에 앞서 전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에스프레소를 소개했다. 그러니까 스타벅스가 뜬 데에는 전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대편에는 맥도날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한산하지만, 점심 때 내려와보니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스타벅스의 핵심 경쟁력은 고급스러움이다. 내부 인테리어나 비싼 가격도 그 일부지만, 무엇보다 그 고급스러움을 구현하기 위해 유럽의 커피숍을 철저하게 벤치마킹한다. 스타벅스가 왜 “라떼” “마끼아또” 등의 이탈리아 어로 된 음료를 파느냐, 그것도 “그란데” “벤티” 등의 기괴한 이름의 용기에 넣어서 파느냐 하면 – 그건 그게 장사 밑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타벅스는 작은 용기 하나에도 유럽적인 느낌을 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애시당초 스타벅스의 컨셉 자체가 1983년 하워드 슐츠가 이탈리아 밀라노를 방문해서 본 유럽식 커피숍이다. 이쯤 되고보면 스타벅스가 커피를 파는 곳이라기보다, 유럽에 대한 동경을 파는 테마 파크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1

참고: 무관심을 파는 다방, 아메리칸 스타벅스

참고: 스타벅스 로고의 탄생

스타벅스의 로고는 본래 15세기 노르웨이의 목각 판화에서 유래했다. 현재의 로고는 초기의 로고에서 많이 달라졌지만 목각 판화의 느낌만은 아직도 약간 유지되고 있다.

3.

세나도 광장을 잠시 둘러본 나는 여행 계획을 짜기 위해 스타벅스에 들렀다. 38파타카짜리 자바 칩 그란데를 마시면서 지도와 팸플릿들을 보다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나도 광장은 아시아에 있지만, 어딜 보나 남유럽의 광장이다. 거기에 이탈리아의 커피숍을 흉내낸 스타벅스가 들어와 있다.

보통 이런 오랜 유래를 지닌 장소에 맥도날드나 KFC가 들어와 있으면(실제로 들어와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언밸런스할 수가 없다. 그런데 스타벅스만은 그렇게 튀지도 않고 은근히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좀 희한해서 그렇지.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면서, 언젠가 유럽 여행을 갈 일이 있으면, 진짜 유럽 커피숍에 앉아 진짜 바리스타가 볶아준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스타벅스지만, 여유 있게 앉아서 살아 있는 거리를 구경하니 너무 좋구나. 서울에는 답답한 아스팔트하고 재미없는 고층 건물밖에 없는데.

4.

스타벅스 효과2라는 경제 용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던 스타벅스의 신화도 요즘 들어서 점점 사그라드는 추세다. 새 점포를 내는 등 사업 확장에만 열중하면서 특유의 희소성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원두를 스스로 볶지도 않는3 스타벅스의 바리스타가 진짜 바리스타일 리 없다. 심지어 맥도날드의 라바짜 커피와 경쟁하기 위해 가격을 내리는 등의 삽질도 했다.4

삽질이 계속되자 창업주인 하워드 슐츠 회장이 복귀하고 이전의 분위기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5 이미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잃어버린 스타벅스가 이전의 영광을 되찾을지는 의문이다.

5.

마카오 한정 스타벅스 머그컵

마카오. 중국의 도시.

그 도시에 자리잡은 포르투갈식 건물.

그 건물에 자리잡은 스타벅스. 유럽의 커피샵을 흉내낸 미국의 커피 체인점.

거기서 일하는 중국인 바리스타. 바깥쪽 자리에 앉아 있는, 아마도 포르투갈인인 것 같은 아가씨.

난생 처음 보는 기이한 조합에 사로잡힌 나는,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스타벅스를 나왔다.

  • 스타벅스와 유사한 케이스로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있다. 실제로는 미국 기업인데, 유럽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하겐다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 유럽 명품 좋아하는 된장녀와 스타벅스의 연관성은 여기서 증명되는 건지도? 

  2. 제품 하나가 프리미엄화를 이루면서 해당 제품 카테고리 전체가 프리미엄급으로 격상되는 효과. 대표적인 예로 와인 삼겹살이 있다. 

  3.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안 가지만, 90년대만 해도 직접 커피를 볶아 줬다고 한다. 

  4. “나 사실 맥도날드하고 그리 다를 바 없어요” 라고 자백한 거나 다를 바가 없다능. 쌩얼을 보이고 말았다능. 그렇다능. 

  5. 얼마 전에는 커피 향이 샌드위치 향과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샌드위치를 판매 중단하기도 했다. 

18 thoughts on “마카오 스타벅스에서

    • 첫 번째 사진 되겠습니다 이전 포스트의 노란색 건물입니다 ㄳ

  1. 그란데 벤티 아주 웃기죠 ㅋㅋ 가격도 어찌나 비싼지 ㅎㅎ

  2. 어쨌든

    바리스타가 안만든 커피를 4000원이나 주고 마실 생각은 영 안듭니다.

    남자라서 그런가?

  3. 으엉으엉 스타벅스닷 고어핀드님은 부르조아ㅋㅋ

    • 아니, 저거 하나 가지고 부르조아라는 평을 받을 이유는 없지 말입니다.

  4. 스타벅스하면 배틀스타 갤럭티카의 스타벅이 떠오르는군..

    • 실제로 스타벅스에서 스타벅을 광고모델로 했던적도 있었지(물론 옛날 스타벅,요즘은 스타벅 역할이 여자로 나오지만 옛날 배갈에서는 남자였다더군)

  5. 별다방은 어디가나 있군요… 별다방 커피도 한국에서만 비싸지 다른 곳에서는 싼 편 아니었던가요? (아님 말고….)

    • 마카오도 우리나라보다 약간 싸더군요. 제가 먹은 게 아마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6천 원 할 겁니다. 뭐 결국 거기도 중국 땅이니 거기 구매력 기준으로 엄청나게 비싼 거 아니냐고 생각하면 다르게 볼 수도 있겠지만요.

  6. 심도깊은 스타벅스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전 세나도광장에서 맥도널드 아이스크림을 사먹은 듯 하군요.. ^^

    • 확실히 무더운 마카오에서 돌아다니려면 아이스크림이 필수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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