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16일 오전 11시 12분

마카오, 몬테 요새

https://live.staticflickr.com/3175/3029556661_3117a389fa_b.jpg

몬테 요새로 올라가는 언덕길. 10여분 정도 걸린다. 좀 지저분하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대항해시대의 식민지 도시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의 식민지 도시라는 것이 보통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는 만큼 항구 시설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여기에 좀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항구를 지키기 위한 수비 시설과 거류민들이 이용하기 위한 종교 시설이다. 특히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병력의 보충도 쉽지 않은 곳에서 해적들과1 항구를 빼앗으려는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는 견고한 방어 시설의 설치는 필수적이었다.

마카오의 요새 언덕(Fortress Hill)에 자리잡고 있는 몬테 요새(Fortaleza de Monte, 대포대大砲台)는 이러한 식민지 요새의 표본과 같은 곳이다. 명나라 조정의 남중국해 해적 진압에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1557년부터 1년에 은 500냥을 내고 마카오를 빌리게 된 포르투갈 인들은 이곳에 항구적인 거주 시설을 설치함으로써 동아시아 진출의 발판 기지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https://live.staticflickr.com/3244/3029571163_688de7dbb3_b.jpg

1557년을 기점으로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영역이 되었지만, 명나라 조정은 여전히 마카오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사법권을 행사했다. 마카오 박물관의 미니어처.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당시 겨우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마카오가 은 500냥이나 가치가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정도 값을 할 만 했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눈독을 들이게 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의 이유는 중국 무역의 중간 기착지로 쓸만해다는 점이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말라카에서 중국 광저우로 가는 것은 지나치게 멀었다. 말라카와 광저우의 중간에 있는 마카오를 손에 넣으면 중국을 드나드는 배들에 물자를 보급할 수 있었다. 1522년 명나라 조정은 중국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서로 장사하는 것을 금했지만, 아예 정기 시장이 설 정도로 중국과의 무역은 왕성했다.

더 중요한 이유로는 마카오가 그 자체로 중요한 무역 거점었기 때문이다. 특히 광저우 - 마카오 - 나가사키 교역은 크게 수지가 맞는 장사였다. 중국의 비단을 일본의 은과 교환한 뒤 중국에 되팔면 쉽게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게다가 1547년부터는 명나라 조정이 왜구 문제로 인해 중국인과 일본인과의 직접 교역을 금지하게 되면서 이 장사는 포르투갈인들이 독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카오는 포르투갈 인들이 들어오면서 빠르게 발전, 얼마 지나지 않아 금, 은, 자기, 비단 등을 취급하는 주요 무역항으로 자리잡았다.

https://live.staticflickr.com/3018/3030427378_07087330c1_b.jpg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마카오 해양사 박물관에 있던 당시의 마카오 축소 모형. 오른쪽이 남쪽이다. 가운데의 언덕 위에 설치된 요새가 바로 몬테 요새다. 오른쪽 아래에는 성당과 학교 건물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다음 방문지인 상파울루 성당이다.(클릭하면 확대됨)

몬테 요새는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진출의 일환으로 1617년부터 1626년에 걸쳐 예수회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바로 옆에 상파울루 성당과 예수회 신학교가 붙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처음부터 요새와 한 세트로 건설된 것이었다.

천주교 선교회가 요새를 건설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당시 동양에 파견된 예수회 조직에는 대포 전문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예수회의 주요 선교 방침 중 하나가 "지배 계급을 개종시키면 쉽게 포교를 할 수 있다." 인데, 동양의 지배 계급이 예수회를 비롯한 포르투갈 세력에 기대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막강한 대포였기 때문이다.2 게다가 선교회란 것이 몇 안되는 군대와 이역만리에 나와 있는 존재인 만큼, 전쟁 무기인 대포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다. 그러니 예수회가 요새 건설을 맡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닌 셈이다. 몬테 요새는 이후 1680년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포르투갈 총독의 첫 공관 역할도 했다.

https://live.staticflickr.com/3031/3029557935_0571b79d0f_b.jpg

요새 입구.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그런데 왜 50년동안이나 조용히 살아오던 마카오에 갑자기 요새가 설치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약간의 뒷사정이 있다. 마카오의 황금기는 대략 1580년부터 1640년까지인데, 이 시기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국이 하나로 합병되어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마카오는 큰 이문이 남는 무역로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한 나라가 되면서 스페인령 마닐라, 멕시코 등으로의 무역로도 열리게 된 탓이다.

https://live.staticflickr.com/3029/3029559499_4f0e1b4203_b.jpg

요새의 내부. 이제 그냥 공원일 뿐이다. 안에 마카오 박물관이 있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하지만 이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1609년,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던 네덜란드 북부 7주는 스페인과의 기나긴 전쟁 끝에 휴전 협정을 맺음으로써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의 해외 진출은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당연히 이는 기존의 무역 거점을 점거하고 있던 포르투갈·스페인과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3 문제는 이 휴전 협정의 기한이 12년으로, 1621년부터는 스페인과의 전쟁이 재개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동아시아의 무역 거점, 마카오가 막강한 네덜란드 함대의 타겟이 될 것은 분명하다.4 몬테 요새의 설치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https://live.staticflickr.com/3049/3030406472_44c4c225c5_b.jpg

몬테 요새의 건설. 정확한 모형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박물관에도 이런 것 좀 많았으면 좋겠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실제로 1622년 6월 23일, 13척의 전함과 1300명의 군인으로 편성된 네덜란드 함대가 마카오를 공격했다. 당시 마카오에는 겨우 150명의 수비병이 배치되어 있었을 뿐 아직 제대로 된 수비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사전 포격 후 상륙한 800명의 네덜란드 군대는 사실상 도시를 장악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 때 마카오를 구한 것은 말 그대로 신의 가호였다. 아직 반밖에 완성되지 않은 상파울루 성당에 설치된 포르투갈군의 대포가 운 좋게 네덜란드 군의 탄약통에 명중한 것이다. 수비대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네덜란드 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이 때를 놓치지 않은 마카오 수비대가 역습을 가하자 네덜란드 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기록에 의하면 수비대에 쫓긴 네덜란드 군이 배로 돌아가기 위해 앞다투어 바다로 뛰어드는 바람에 수도 없이 빠져죽었다고 한다.

1626년 완성된 몬테 요새 안에는 21문의 대포와 주둔군을 위한 병영, 우물, 그리고 최대 2년간의 농성전에도 버틸 수 있는 탄약과 식량 등이 보관된 병기고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이상 마카오에 전쟁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병영과 병기고는 자취를 찾을 수 없었지만 우물과 21문의 대포만은 그대로 남아 빈 요새를 지키고 있었다.

https://live.staticflickr.com/3143/3030393352_b8ed405b07_b.jpg

요새의 넓이는 대략 10000제곱미터 정도 된다. 17세기의 대포가 최신식 건물을 겨냥하고 있는 풍경이 묘하게 느껴졌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요새를 둘러본 뒤 11시 42분, 요새 안의 마카오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박물관 내부에 크게 흥미를 끄는 물건은 몇 없었지만 기존에 가지고 있지 않던 각종 병장기와 명도전(明刀錢)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아주 선명하게 잘 나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https://live.staticflickr.com/3068/3029566945_6636ed8310_b.jpg

요새의 남쪽 벽에서 찍은 사진. 화려한 카지노의 풍광과는 정반대로 마카오의 일반 민가는 낡고 지저분했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https://live.staticflickr.com/3186/3029573069_ee9e93eaf0_b.jpg

서쪽 벽에서 찍은 사진. 상파울루 성당의 폐허가 보인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오전 12시 15분, 나는 몬테 요새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다음 목적지는 마카오의 랜드마크, 상파울루 성당이다.


  1. 특히 마카오가 자리잡고 있는 남중국해의 경우 이른 시기부터 해적들의 유명하여 중앙 정부조차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이었다. 

  2. 이것은 여진족과 전쟁중이던 명나라, 내전중이던 일본과 베트남 모두에 해당된다. 

  3. 대항해시대4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게임 속에서 포르투갈의 카스톨 상회는 게임 종반, 포르투갈을 합병한 스페인의 발데스군과 싸우게 된다. 동남아시아 해역으로 가면 포르투갈의 페레일라 상회가 새로 진출해 온 네덜란드의 쿤 상회와 다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페레일라 상회는 동아시아의 마카오에도 거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앞에서 이야기한 마카오 - 나가사키 무역로도 게임 속에 그대로 나온다. 코에이, 알고보면 정말 무서운 애들이다. 

  4. 이전에도 몇 번 공격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