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외교관들이 협상의 개념을 상충되는 두 입장 사이에서 서로 양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크렘린 사람들은 협상을 이기기 위한 싸움으로 본다.

- Herb Cohen, 『You can negotiate anything』, 1980-1994 (허브 코헨, 『협상의 법칙』, 청년정신, 2001, 제 1권 pp.225)

아래는 그 한국식 버전.

기본적으로 북한의 화법에서는, 적반하장이 당당함의 동의어이다.

- sonnet, 지도국 발표 담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한국 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협상에서 양측은 휴전선의 위치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 초기의 요구 사항을 제시했었다. 양측의 입장은 상당한 이견을 보이는 가운데, 팽팽하게 맞섰다. 그 때 국제연합 측에서 갑자기 적합한 협상 전략을 포기한 채 성급하게 중요한 양보를 했다.북한에서 온 구소련식 사람들과 절충을 하려다가 우리의 최종 양보 안을 노출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양보 안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약함의 표시로 받아들였고, 더욱 완고해진 협상 자세를 보였다.

휴전 협정에서 UN측을 대표했던 미국의 터너 조이 C.Turner Joy 제독은 아무런 보답도 받아내지 못한 이 성급한 양보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주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교착상태에 몰린 문제는 상호 양보하며 해결해야 한다는 우리 미국식 성향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지연전술을 쓰는 데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족보야 어떻든 간에 구소련식인 사람들과의 협상에서는 그들에게 무언가를 양보했다 해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지 못하게 되기 쉽다."

- 같은 책, pp.227

위 책의 저자 허브 코헨은 소비에트식 협상법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서, 러시아 인들이 미국에서 42만 달러짜리 땅을 사기 위해 처음에 12만 5천 달러를 불렀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협상법은 한국 전쟁의 정전 협정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회담에서 공산군은 "이 전쟁은 남한과 미국이 시작한 전쟁이므로 전쟁 전의 상태인 38도선으로 마땅히 복귀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1

공산군의 고집을 꺾은 것은 결국 UN군의 무력 시위였다. 1951년 8월 2일, 35대의 UN군 폭격기가 나진항을 폭격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겨울을 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중공군의 사정도 있고 해서 공산군은 겨우 38도선 주장에서 물러났지만, 이 문제는 무려 반 년을 더 끌었다.

1952년 1월 27일, 양측은 "정전 협정이 지정하는 시간상의 양군 접촉선으로 한다." 는 안에 겨우 합의했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접촉선이 곧 군사 분계선" 이 기정 사실이 되어버리자, 한 치의 땅을 더 빼앗기 위한 지리한 공방전이 무려 1년 반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결론:

  1. 문화의 차이는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2. 우린 정말 골치아픈 동포를 두었군요(...)

  1. 당시 UN군은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지상군에서 우위를 점한 상태였으며, 한반도 전토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