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나는 연애편지를 정말 많이 써본 사람이다.

정작 내 게 하나도 없어서 문제지만.

1.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커플링을 하는 게 흔하지만, 내가 살던 동네는 좀 조숙한 감이 있어서 내가 아직 어리던 시절에도 그런 문화가 있었다. 그 속에서 내가 하던 일은, 서툰 풋사랑의 감정을 전하고픈 친구의 마음을 살짝 손봐 깨끗하게 글로 옮겨주는 것이었다. 마음은 있지만 그걸 전달하는 재주는 다소 모자라는 소년. 글은 좀 쓰지만 그 "판" 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던 못난이(Nerd). 자원의 비대칭적 분포란 이런 것인 모양이었다. 신의 섭리는 이토록 오묘하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본의 아니게, 서툰 사랑을 하는 내 또래 소년들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백 개의 마음이 있다면 백 개의 사연이 있었고, 서툴거나 조숙한 정도도 다들 달랐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사랑과 연애라는 테마가 가져다주는 다양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기야 괜히 인류의 영원한 테마라는 별명이 생긴 건 아니겠지.

2.

추석 때 시간을 내서 "시라노: 연애 조작단" 을 봤다. 의뢰인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한 이벤트와 연출을 해주는 "연애 조작단" 이야기다. 주의 깊은 사람은 알았겠지만, 영화의 정확히 2/3 지점(그러니까 대략 1시간 20분 지점)의 와인바 씬에서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 4번 4악장, "사라방드" 다.

워낙에 유명한 곡이다 보니, 아마 제목은 몰라도 귀에 익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 하프시코드는 바로크 시대에 많이 쓰인 피아노의 전신(前身) 격 악기인데, 고전주의 시대 이후 잘 쓰이지 않아 지금은 피아노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 곡의 국내 유통 음원 중에는 하프시코드 연주 버전이 있지도 않다. 하프시코드의 차분한 음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애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