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del, Harpsichord Suite No. 4 in D Minor – 4. Sarabande

고백하자면, 나는 연애편지를 정말 많이 써본 사람이다.

정작 내 게 하나도 없어서 문제지만.

1.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커플링을 하는 게 흔하지만, 내가 살던 동네는 좀 조숙한 감이 있어서 내가 아직 어리던 시절에도 그런 문화가 있었다. 그 속에서 내가 하던 일은, 서툰 풋사랑의 감정을 전하고픈 친구의 마음을 살짝 손봐 깨끗하게 글로 옮겨주는 것이었다. 마음은 있지만 그걸 전달하는 재주는 다소 모자라는 소년. 글은 좀 쓰지만 그 “판” 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던 못난이(Nerd). 자원의 비대칭적 분포란 이런 것인 모양이었다. 신의 섭리는 이토록 오묘하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본의 아니게, 서툰 사랑을 하는 내 또래 소년들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백 개의 마음이 있다면 백 개의 사연이 있었고, 서툴거나 조숙한 정도도 다들 달랐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사랑과 연애라는 테마가 가져다주는 다양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기야 괜히 인류의 영원한 테마라는 별명이 생긴 건 아니겠지.

2.

추석 때 시간을 내서 “시라노: 연애 조작단” 을 봤다. 의뢰인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한 이벤트와 연출을 해주는 “연애 조작단” 이야기다. 주의 깊은 사람은 알았겠지만, 영화의 정확히 2/3 지점(그러니까 대략 1시간 20분 지점)의 와인바 씬에서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헨델의 하프시코드 모음곡 4번 4악장, “사라방드” 다.

워낙에 유명한 곡이다 보니, 아마 제목은 몰라도 귀에 익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 하프시코드는 바로크 시대에 많이 쓰인 피아노의 전신(前身) 격 악기인데, 고전주의 시대 이후 잘 쓰이지 않아 지금은 피아노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이 곡의 국내 유통 음원 중에는 하프시코드 연주 버전이 있지도 않다. 하프시코드의 차분한 음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애석한 일이다.

재미있는 건 영화에 차분함을 더해 주던 이 곡의 정체. 사라방드Sarabande는 헨델 당대에 유행하던 일종의 춤곡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헨델의 작품 중에는 같은 제목이 붙은 곡이 이것 말고도 몇 개가 더 있다. 문제는 요새 이걸 듣는 사람 중에서 이걸 춤곡으로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곡이 본래 춤곡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깜짝 놀란다. 그럴 만도 하다. 실제로 이 곡은 에 삽입된 “나우시카 레퀴엠” 의 원곡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이 곡이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더는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한다.

3.

아는 동생 하나가 실연을 했다. 울고불며 괴로워하는 그 모습을 보자니, 높은 곳에서 떨어져 산산조각난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연애의 기쁨과 즐거움을 모르는 내가 실연의 슬픔과 비참함을 어찌 알겠냐만, 아마도 이런 게 진심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친구가 세상이 무너져버린 사람처럼 저러고 있지는 않을 터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랑이라는 게 한쪽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었다면, 이 세상 모든 슬픔과 갈등의 9할 9푼은 아마도 사라졌겠지.” 그래, 지금 이 상황에 딱 맞는 말이다. 그녀가 떠나가는 데, 그의 진심 같은 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었다.

4.

친한 형 K 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슬쩍 보니, 수신자 이름은 없고 하트 하나만 달랑 보인다. “누구한테 보내는 거에요?” “누구긴 누구겠냐ㅋ” 여친인 P양에게 보내는 것인 모양이었다. 문자 하나를 보내면서도 입이 귀에 걸린 걸 보니, 저렇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말하는, 그 “진심” 이라는 물건의 또다른 모습인 모양이었다.

“거짓” – 혹은 “조작”으로 사랑을 이뤄 주는 연애 조작단이라는 소재가 무색해지게, 이 영화는 진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아무리 서툴고 어설퍼도 진심이면 꼭 이루어질 거에요.” 맞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현실을 바꾸지 못할 수준의 바램이란 결국 진심이 아니라 “아니면 말고” 에 불과한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필자로서의 내 기억은 꼭 반대 사례들만을 오래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언젠가 들었던 드라마의 대사 한 토막도 함께 생각나곤 한다: “진심이면 뭘 하나요? 그걸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5.

아직도 궁금하다.

듣는 이들이 춤곡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춤곡인 것일까,

아니면 타고나길 춤곡이면 춤곡인 걸까?

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진심인 걸까,

아니면 품고 있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진심인 걸까?

진실은 어느 쪽일까?

제목과 느낌 사이의 괴리감으로 만만치 않은 곡에는 포레Faure의 파반느Pavane가 있다. “파반느” 또한 춤곡의 장르인데, 이 곡은 무려 천안함 피격 사태 때 유족들을 위한 성금 모금 프로그램에서 사용됐다. 정체가 궁금하다면 일단 들어 보시라.

12 thoughts on “Handel, Harpsichord Suite No. 4 in D Minor – 4. Sarabande

  1.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은 거의 없는 게 맞는 것 같긴 해 ㅋㅋ
    언제나 행동만 가지고 판단을 할 수밖에 없게 되지 =_=

  2. 제 생각으로는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의 의견과 그 음악의 태생이 꼭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의 태생을 알고 듣는 것과 모르고 듣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지요. 비슷한 곡으로 비탈리의 샤콘느가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으로 꼽지만 이 역시 춤곡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i4B1ifcWa9o

    마찬가지로 진심과 진심이 이루어짐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다 성립 가능하다고 저는 봐요. 전 진심이라는 것은 의향이지 현상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진심이면 통한다는 말도 전 거짓이라고 봅니다.

    • 예, 저도 진심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안된다는 쪽에 좀 더 가깝습니다. 흔히 진심이면 이루어진다고들 하는데, 그 진심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루어지는 진심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3. 헙 너에게 연애편지 교정을 맡기는 사람이 있었다고??????

  4. 어? 정말 이게 춤곡이었나요? 듣고나서 춤추는 장면을 오버랩핑 해보니 얼추 맞는 것 같기도…

  5. 오오 필력이 그때부터 출중하셨군요.

    트위터 보니까 계속 301동 302동 이렇게 출몰하시던데… 저는 직장인이신 줄 알았는데 병특 하고 복학하셨나봐요? ^^ 해박한 역사 지식에 감탄해 오다가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리고 저 “춤곡”이 “춤곡”이라는 사실에 또 놀라는… 이거 참 놀랄 일이 많군요 오늘은ㅎㅎ

    • 하하,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그 정도로 글을 잘 쓰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_^; 말씀하신 대로 작년까지 병특 하고 올해 복학했습니다. 내년엔 대학원에 있을 것 같네요.

      트위터에서 자주 뵙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블로그 자주 방문해 주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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