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면 뭘 하십니까?

저는 여행지에서 책을 읽습니다.

2010년 8월 20일

일본 규슈(九州) - 나가사키(長崎)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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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란다자카로 올라가는 길. "오란다" 는 네덜란드를 가리키는 말로, "네덜란드 인들이 사는 언덕" 정도의 의미다.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책 이후로도 네덜란드 인들만은 거주 및 교역이 허락되었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여행을 가면 꼭 하는 게 있다. 카페 같은 데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이다. "평소에도 책을 손에 붙이고 살면서 여행지에서까지 또 책이냐" 며 타박하는 소리가 들릴 법도 하다. 하기야 비싼 돈을 들여 머나먼 이국까지 왔다면, 일분 일초라도 더 돌아다니면서 즐거운 체험을 하는 게 들인 돈에 대한 예의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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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란다자카에 있는 야마노떼 13번관에서. 과거의 작은 서양식 집은 이제 네덜란드 과자와 홍차를 파는 작은 카페가 되어 있었다. 내부 구경은 무료로 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 아침, 땀을 식히면서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나는 독서의 이유를 "스스로를 개조하기 위해서" 로 본다. 책을 읽음으로써 생각이 바뀌고 시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구태여 시간을 들여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지하철이나 침대에 있는 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다. 매일 매일 말이다. 그러니까 독서가 일상인 셈인데, 그렇다면 이건 묘하게 모순이 된다. 타성에 젖은 스스로를 바꾸는 계기를 만들려고 책을 읽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일상의 일부가 되어 타성에 젖어 버린다면?

기껏 이역만리까지 가서 책을 펼쳐드는 것은 어떤 이들의 눈엔 한심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이 시간은 상당히 중요한 시간이다. 우선 이 시간은 독서라는 행위에 전적으로 할당되는(Allocated), 매우 희귀한 종류의 시간이다. 더 중요한 것은, 색다른 환경에서 책을 읽음으로써 평소에는 놓치고 지나가던 생각의 파편들을 잡아내는 시간이라는 점이다. 이런 훌륭한 기념품들을 건질 수 있다면 여행지에서 책이나 보는 행위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 아니 여행이라는 행위가 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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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버 저택Glover Residence. 반막부 전쟁에 나선 조슈 번에게 총기를 구입해 주어 메이지 유신에 큰 도움을 준 영국 상인 글로버의 저택이다. 그가 죽었을 때 일본 정부는 국장을 치러 가면서 그를 기렸다. 글로버의 저택과 거기 딸린 정원은 나가사키의 명물이 되어 지금도 많은 방문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일주일의 규슈 여행 도중 나는 iPad 전자책을 포함해서 모두 네 권의 책을 읽었다. 경제, 경영, 역사 등 책의 종류도 제각각이었다. 책의 권수도 좀 됐고 얻은 지식도 많았지만, 그것보다 내가 독서 도중에 떠올린 생각과 발상들이 훨씬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걸로 어쨌든 본전 뽑았군." 이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큰 돈을 들인다 한들, 애당초 파는 곳도 없는 "생각" 을 도대체 어디서 사겠는가? 이런 식으로라도 얻으면 그걸로 좋은 것 아닌가?

태합입지전 같은 게임을 해 보면, 명승 고적에서 명상을 하면 깨달음을 얻으면서 전투 비기 같은 것을 얻곤 한1다. 그래, 내게 여행 중 독서 시간이란, 딱 그런 의미다. 아무데서나 얻을 수 없는 비기를 얻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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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버 정원 안에 있는 작은 서양식 카페, 지유떼이(自由亭)에서. 내가 좋아하는 바로크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더치 커피와 카스테라를 즐기면서 iPad로 책을 읽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이곳의 더치 커피는 목으로 넘길 때 묘하게 한약스러운 쓴맛이 나는데, 아주 마음에 든다. 나가사키 카스테라도 설탕이 바삭바삭 씹히는 게 정말 맛있다.(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1. 발해지랑 님의 말씀에 따르면, 내가 규슈에서 들렀던 아소에서도 비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얘길 듣고서 한참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