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를 깠으니, 갑옷도 까야죠?

한반도의 갑옷 생산

한반도의 갑옷 생산은 적어도 기원 전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갑옷 조각이 아직도 전하거든요. 하지만 본격적인 양산 시스템이 갖춰진 것은 약 4세기경으로 생각됩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기존의 소국들이 급격히 국가의 꼴을 갖추게 되죠. 그 결과로 신분제가 공고화되면서 노비 등을 순장시키는 풍속이 등장했고, 무덤 부장품에서도 기존에는 잘 보이지 않던 칼이나 갑옷 등의 무구류가 쏟아져 나오는 등 그 성격이 급속도로 폭력화됩니다. 국가 체제가 잡혀가고 전쟁의 규모가 커지면서 갑옷 생산 또한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갑옷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철이나 가죽으로 평평한 판을 이어붙여서 만드는 판갑이고, 또 하나는 작은 직사각형 판(소찰小札)들을 가죽 끈으로 꿰어 만드는 찰갑입니다. 전자는 비교적 만들기 편한 대신 갑옷에 유동성이 없어서 말을 타는 기병이 입기는 힘듭니다. 반면 후자는 만드는 데 손이 정말 많이 가는 대신 갑옷에 유동성이 있어서 기병도 편리하게 입을 수 있습니다. 이전에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남부에서 쓰이던 갑옷은 주로 판갑이었습니다. 보병 중심의 전쟁이었던 것이지요.

기병 전술의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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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의 철제 등자. 5~6세기. 서울 아차산, 고구려군 제 4보루.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가야 침공은 전쟁과 무기의 역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으로 작용합니다. 금관가야의 괴롭힘을 참지 못한 신라가 고구려에 원군을 청한 것이 발단이 된 이 전쟁의 여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이 전쟁은 당시의 역학 구도를 바꿔 놓았습니다. 이전까지는 김해에 있던 금관가야(가락국)가 경주 지역의 신라(사로국)보다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가야군은 당장 박살이 났고, 금관가야는 이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습니다. 신라는 오히려 죽다 살아났고, 그 후 세력을 회복하여 결국 삼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이 전쟁의 또다른 결과는 한반도 남부에 본격적인 기병전술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전쟁 이전에도 물론 한반도 남부에 기병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가 적어 본격적인 병종이라기보다 신분이 높은 전사들이 갖추는 특별한 형태의 무장에 가까웠습니다. 반면 고구려군이 구사한 중장기병 전술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마갑과 갑옷으로 중무장한 대규모 기병을 집단적으로 운용함으로써 가야군 보병 전열을 갈아엎어 버렸거든요.

중장기병의 무서운 전투력을 목격한 한반도 남부의 국가들은 이후부터 본격적인 기병 전투력을 확보하는 데 열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무기와 갑옷도 기병에 맞춰서 바꿔야 합니다. 실제로 기병에게 쓸 수 없는 판갑은 5세기 이후의 고분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갑옷 생산의 주류 자체가 찰갑으로 넘어가게 된 것1입니다.

하지만 판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후 한반도 남부에서는 기존의 판갑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새로운 판갑도 등장하게 됩니다. 대금식 판갑이 등장한 것입니다.


  1. 물론 이것도 지역차가 있다. 경주 지역(신라)의 경우, 4세기 후반부터 슬슬 찰갑으로 그 관심을 옮기기 시작한다. 반면 부산 지역의 경우, 철제 찰갑 자체를 생산한 것은 경주보다 빠른 것 같지만 양산 체제로 들어가는 건 더 늦다. 심지어 김해 지역(금관가야)의 경우, 5세기 이후의 고분에서도 판갑이 꽤 많이 나온다. 게다가 찰갑을 만들게 된 후에도 만들기 힘든 철제보다 양산이 쉬운 혁제를 더 선호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