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이 되기로 한 사나이

* 이 글은 시리즈의 토막글입니다.

나는 악당이 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I am determined to prove a villain.) –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3세』, 1막 1장.

1.

영화 『킹스 스피치(2010)』에 등장하는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 역)는 말더듬이를 치료하는 언어치료사이지만, 동시에 셰익스피어 연극을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한다. 실제로 그는 호주에서 살 때 극단에서 연기를 하기도 했다. 런던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틈만 나면 오디션을 보러 극단을 찾아가지만, 번번이 퇴짜만 맞는다. 느낌이 안 산다는 게 이유였다. 그에 대한 극단 감독의 평은 좀 더 직접적이다: “왕위에 대한 야망으로 사로잡힌 꼽추의 처절한 감정이 느껴지지가 않네요.” 한 마디로 연기력이 안 된다는 얘기다.

“그만!!”

하지만 로그는 연기에 대한 그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언제나 셰익스피어 책을 끼고 살고, 주요한 장면들 하나하나를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 대사를 줄줄 외운다. 심지어 그에게 말더듬이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한테도 셰익스피어 희곡의 대사들을 연습삼아 읽도록 한다.

2.

“동생이 형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싶은 거야. 와~ 완전 중세 시대 같네?(possibly… medieval!)”

앨버트(=조지 6세)의 형 에드워드 8세. 널리 알려진 그의 이미지란 훗날의 패션에 큰 영향을 미친 당대의 패션 가이, 혹은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렸다.”는 낭만적인 이야기의 주인공 정도다. 하지만 공인으로서의 자질에 대해 말하자면, 무책임하고 성정이 가벼워 도저히 왕 노릇을 제대로 할 사람이 못되었다는 게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다.

영화에서 영국 국왕 에드워드는 파티장에서, 왕 노릇에 소홀하다고 말더듬이 동생 앨버트가 잔소리를 하자 이렇게 비꼰다.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은 아마 이 대사를 그냥 흘려보냈겠지만, 아마 이 영화를 보는 영국 국민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영국인들에게는 저 소리가 빈 소리가 아니기1 때문이다. 저 이야기는 영국 국왕 리처드 3세(1452~1485)의 이야기다. 영국 국민들이 고작 2년 집권하고 전사해 버린 이 사람을 모를 수가 없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해서 희곡 『리처드 3세』를 썼기 때문이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리처드 3세는 광기가 서린 악당으로, 선천적 불구와 추악한 외모를 타고 난 스스로를 저주하여 왕위를 차지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결국 음모를 꾸며 작은형 조지를 죽이고, 충격을 받은 큰형 에드워드가 죽자 어린 조카들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한다. 그리고 어린 조카들이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트린 뒤 그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23

1995년 이안 맥켈런 경 주연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오오 간달프 오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사실상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염두에 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재미있는 건, 이 영화가 이 희곡을 처음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로그가 연기 오디션을 볼 때 했던 역이 바로 리처드 3세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가 읊었던 대사는 그가 처음 등장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지를 내보이는 장면이었다.4

3.

우리들에게는 셰익스피어는 그저 유명한 외국 극작가에 불과하지만, 영어에 있어서 셰익스피어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영어라는 언어를 반쯤 만든 사람이다. 그의 작품에서 유래한 표현과 관용어들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1611년 간행된 킹 제임스 성경 정도다. 둘 중 하나만 빼버려도 영어라는 건축물의 절반 정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런 탓에,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은 굳이 작품을 직접 읽지 않더라도 여기저기서 접할 수 있다. 『멋진 신세계』 같은 SF 소설부터 『Y의 비극』5 같은 추리소설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인용되는 게 셰익스피어다. 『킹스 스피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이 단순 인용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 주인공들의 상황이나 심정을 암시하는 데 이 대사들이 쓰이기 때문이다. 말더듬이 증세를 고치기 위해 로그를 찾아간 앨버트는 발성 연습을 하면서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를 읊는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편 선왕 조지 5세가 승하하고 앨버트의 삶에 폭풍우가 몰려오는 장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 『템페스트』가 인용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4.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리처드 3세』다. 극중 앨버트의 상황과 이만큼 잘 맞는 작품도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리처드 3세 연기를 하다가 퇴짜를 맞는 로그의 모습은 앨버트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선왕 조지 5세는 앨버트를 잡아다놓고 연설 연습을 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는 배우야. 옛날처럼 말 위에 앉아서 위엄만 보이면 되는 게 아니라 국민들 비위를 맞춰줘야 한단 말이다.” 이 점에서 앨버트는 로그와 비슷하지만, 문제의 크기는 훨씬 크다. 연기를 지켜보는 사람 수가 비교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매일 정무를 보느라 바쁜 와중에도 둘째아들 앨버트에게 직접 연설 연습을 시키면서 말더듬이 증세를 고치려 한다.

앨버트는 두렵다. 연기력이 모자라는 배우처럼 국민들 앞에서 왕 노릇을 못 하는 게 두렵고, 리처드 3세같은 악명 높은 왕으로 남는 것이 두렵다. 결국 그는 대영 제국을 전성기로 이끈 위대한 왕들의 초상화가 걸린 방에서, 각료들 앞에서 국왕 선서를 하다가 또 말을 더듬고 만다. 신하들이 안 보는 데서, 그는 울부짖는다. “난 왕이 아니야… 조지 3세처럼 미쳐버리면 어쩌지? 미치광이 말더듬이 왕 조지 6세?”

5.

『리처드 3세』의 주인공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에 꼽추였고, 추물이었다.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아니, 왕실이라는 환경이 그를 장애로 만들었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리처드 3세는 왕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형과 조카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 그의 뒤에 남은 건, 온갖 더러운 음모와 악행이었다.

조지 6세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왕위에 의지가 전혀 없는 형을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남은 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와의 전쟁이었다.

리처드 3세는 왕이 되었다. 그에게 떨어진 것은 천벌이었다. 고작 2년 뒤, 그는 적과의 전투에서 삶을 마감했다. 죽은 후에도 그에게는 영원한 악명이 뒤따라다녔다.

조지 6세도 왕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국왕이 필요했던 어려운 시기를 헤쳐갔다. 그는 피난을 가라는 신하들의 조언을 거부하고, 런던에 남아 독일 공군의 공포에 떠는 영국 국민들의 곁을 지켰다.

최소한 그는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근거 없는 허언을 일삼거나, 다리를 끊고 저 혼자서 도망가거나, 돌아와서 적 치하에서 고생한 국민들을 부역자로 몰아 총살시키지 않았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 앨버트(=새 영국 국왕 조지 6세)의 개전 연설을 듣는 영국 국민들.

아마 한국 사람들에게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한 장면 하나하나가 별 의미가 없었을 게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들이 빠졌을 때 과연 이 영화가 2011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을지 의문스럽다.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은 더 찬연히 빛나듯, 말더듬이 앨버트는 대악당 리처드 곁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 영국 내 공화파들은 이 영화를 엄청나게 싫어한다는데, 그럴 만도 하다 싶다. 이건 거의 “구름 위에서 살던 왕족이 영국 국민들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해 하계로 내려와 백일동안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었다.” 수준 아닌가.

참고문헌

강태경, 『리처드 3세』, 지만지, 2008


  1.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미국 사람이나 호주·캐나다 사람도 비슷하지 않을까? 

  2. 이 내용은 셰익스피어 당대의 역사적 저술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역사적 연구는 “영국판 수양대군”에 대해 현격히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리처드가 왼쪽 어깨가 약간 더 솟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꼽추에 추물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에 대해 “연회장 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 중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묘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조카들 역시 사생아가 분명했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이 없었던 탓에, 그는 구태여 조카들을 살해할 동기도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증거가 없다. 그의 죽음 또한 폭정 때문이라기보다 중앙 집권화를 추구한 그의 개혁 정책에 귀족들이 반발해서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영향으로 인해 리처드 3세는 극히 최근까지, 추악하고 교활한 악당의 대명사로 통용되어 왔다. 

  3.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차렸겠지만, 리처드의 형과 앨버트의 형 둘 다 이름이 “에드워드”다. 

  4. 이 부분은 희곡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으로, 로그가 연기했던 부분은 그 가장 앞 부분이다. 그러니까 막 연기를 시작했는데 감독이 퇴짜를 놓은 셈. 그리고 이 부분의 마지막 대사가 바로 글 서두에 인용한 바로 그 문장으로, 가장 유명한 대사다. 

  5. 주인공 탐정 드루리 레인이 세익스피어 극단에서 활동하던 배우 출신이다. 

4 thoughts on “악인이 되기로 한 사나이

  1. 주석 달아놓으시긴 했지만, 본문 내용만 읽다 보면 동생이 형을 왕위에서 끌어내리려고 한다는걸 그냥 전달하시는거 같아요. 리처드 3세가 완전 천하에 나쁜 놈으로 이렇게… ….
    형인 에드워드를 왕위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고, 게다가 2년만에 전장에서 죽은거야 당시 시대 자체가 장미전쟁이 계속되던 왕위다툼의 와중이었으니…. …ㅠ_ㅠ

    • 예, 사실 이 건만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이런 류의 작품들을 다룰 때는 실제 역사하고의 간극 때문에 고민하곤 합니다. 주석 같은 거 안 읽고 그냥 넘어가는 분이 계실까봐요;

  2. 저 영화에 저런 숨겨진 장치가 있었군요
    꼭 한번 봐야겠네요 ^^

    • 예, 후회 안 하실 겁니다. :) 사실 저는 영어 공부하느라 외웠던 연설문 중 몇 개가 저 영화에서 나온 바랍에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더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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