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의 왼쪽, 투구의 오른쪽

오늘은 한 가지 미묘한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바로 중세 유럽 투구에 있어서의 왼쪽과 오른쪽입니다.

1290년대의 일반적인 기사의 모습(재현품). 13세기 말의 그레이트 헬름을 잘 묘사하고 있다. 투구 하단에 보이는 십자 모양 구멍은 투구를 꿰기 위한 쇠사슬을 걸치기 위한 구멍이다. 이 쇠사슬을 갑옷에 걸침으로써 투구를 편리하게 쓰고 벗으면서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히긴스 아머리 소장.

지난 번 포스트에서 언급했습니다만, 14세기 초 그레이트 헬름에는 가드 체인을 꿰기 위한 구멍이 뚫렸습니다. 보통 양쪽에 두 개를 뚫는 게 보통이었던 듯하지만 위 사진처럼 왼쪽에만 뚫을 수도 있죠. 문제는 14세기 투구의 대부분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호흡을 위한 구멍을 왼쪽에 더 많이, 더 크게 뚫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예 오른쪽에는 구멍을 뚫지 않은 것도 이따금 있습니다. 이렇게 상당수의 중세 투구 복원품에서도 투구의 오른쪽 부분에 구멍을 뚫지 않습니다. 그레이트 헬름이냐 배서닛이냐를 구분하지 않구요. 투구의 오른쪽과 왼쪽이 약간 다르게 취급되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갑옷 장인들이 심심해서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비대칭형으로 만든 걸까요? 하지만 알고 보면, 여기에도 이유가 있답니다.

등짝… 아니, 투구를 보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기사들의 절대 다수가 오른손잡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의 필수 무기인 창도 오른손으로 쓰는 게 표준이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말을 모는 방법 또한 여기에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말과 상대방이 타고 있는 말이 부딪히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의 왼쪽이나 오른쪽 둘 중 하나를 스쳐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상대방의 왼쪽으로 말을 몰면 오른손에 든 창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따라서 말을 몰 때 상대방의 오른쪽을 스쳐 지나도록 말을 몰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상대방의 몸 오른쪽을 타격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상대적으로 가까워서 조금만 움직여도 맞출 수 있거든요. 당연히 얼굴도 오른쪽 얼굴이 공격당할 확률이 높아지겠죠.

그러니까 공격은 오른쪽에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연히 방어력을 희생시키기도 부담스러운 부위가 될 수밖에 없죠.

공격을 자주 받는 오른쪽엔 구멍을 뚫기가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자, 이제 아시겠죠? 호흡 등의 이유로 인해 투구의 안면방어판에는 반드시 구멍을 뚫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필연적으로 투구의 방어력을 감소시킵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에게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오른쪽보다 왼쪽에 뚫는 것이 더 합리적이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안면 방어판이 등장한 13세기 이후 적지 않은 수의 중세 유럽 투구 유물들이 왼쪽에 구멍을 더 뚫는 경향이 있습니1다. 구멍 크기가 좀 더 큰 경우도 많구요.

하지만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특히 게임이나 영화에 사용되는 소품에서는 거의 무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는데, 이건 사진으로 봐서는 잘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대칭형으로 구멍이 뚫린 유물을 정면에서 찍어 놓은 사진 자체가 없는데다가, 설령 찍어 놓는다 해도 이런 미묘한 차이는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어지간한 덕후가 아닌 이상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사실은 또 하나 중요한 면을 암시합니다. 모든 무기와 방어구가 그렇듯이, 투구 또한 주위의 환경과 덜렁 떨어져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사용되는 무기, 갑옷,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신체와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사람 신체가 결국 거기서 거기인 만큼, 하나의 투구와 갑옷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원리는 전혀 다른 시대와 문화권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서양 갑옷을 공부하려면 한국 갑옷, 일본 갑옷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뭐, 세상사 안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만.


  1. 사실 이 ‘구멍’을 뚫는 것도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다. 하운드스컬형 배서닛의 경우 초기에는 시야 확보 구멍을 단순하게 수평으로 뚫었지만 오래지 않아 아래쪽으로 기울어진 방식으로 뚫었다 – 이렇게 하면 화살이나 작은 파편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도 시야를 충분히 확보할 수가 있는데, 하운드스컬형 배서닛에서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는 돌출된 코 외에도 이 부분에 크게 기인한다. 아예 눈에 작은 창살을 장착한 경우도 발견되는데, 이 경우 시야가 다소 제한되었을 듯하다. 

9 thoughts on “투구의 왼쪽, 투구의 오른쪽

  1. 흥미롭네요. 방패를 들면 왼쪽이 돌출될텐데, 역시 방어보단 공격이 우선이란 걸까요. 좋은 정보 알게 됐습니다.

    • 코멘트를 달고 보니 저 때면 이미 방패를 안 드는 게 유행이 된 시절이었다는 게 떠오름(…..)

    • 방패는 이때쯤부터 슬슬 ‘식별 도구’ 쪽으로 비중이 옮겨가고 있던 시대죠;

  2. 그랬군요.
    전 갑옷에는 그렇게까지 큰관심은 없습니다만, 고어군님의 글을 읽다보니
    재미난 부분이 많은것같습니다. 미디블 토탈워도 하고싶지만, 제 노트북과 데탑 모두
    사양이 너무낮아 안되더군요.
    저도 검도를 약간했지만, 말씀하신 부분이 굉장히 정확하신것같습니다.
    오른 허리는 보통 간과를 하죠. 공격자나 수비자나.
    필살기같은 기술을 하나씩은 연마하지만, 제경우에는 찌르기였습니다. (컥)
    그런데 오른허리는 정말 예상외군요. 일단 근육이 잘 쓰지않는 근육들을 써야하는것같아서,
    스피드도 느릴뿐더러, 무엇보다 상대가 막기가 쉬우니까요.
    (이게 은근 쾌감이 상당합니다.. 연마해보심이;; 쿨럭;;)

    오면서 버스안에서 본글이라, 사실 본 직후에는
    “근데 그게 왼쪽구멍과 무슨상관인가. 큰차이가 없지않은가”생각하다가
    카드찍고 내릴때 필립스의 광고카피가 생각나더군요. 작은 차이가 더 좋은 제품을 만든다고요.
    중세기사들은 큰 창을 사용했다던데요, 그것때문인가요?
    아무래도 (공격자가 바라볼때) 왼쪽보다 오른쪽에 구멍이 있는 경우가
    공격을 흘리기에도, 유효 및 치명타를 받기에도 더 나은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래저래 저거 쓰고 돌아다녔을 중세 기사분들은 그래서 키가 더 작었던걸수도……(응?)

    • 현대인보다 키야 작았겠습니다만, 어렸을 때부터 전투를 대비한 훈련을 받으니 체격이나 체력은 비교할 바가 못되었겠죠.

  3. 늘 포스팅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잡이의 창칼이 상대방의 오른쪽을 가격하기 쉽다는건 잘 이해가 되질 않네요.. 검도는 안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오른손잡이가 휘두르면 왼쪽 부위가 가격당하기 쉬운것 아닌가요?

    실제로 지금도 쌈박질 하다가 턱뼈나 얼굴뼈가 부러져 응급실 오는 사람들은 왼쪽 부위 골절이 현저히 많습니다.

    혹시 왼쪽은 방패로 가릴 수 있어서 그런건 아닌가.. 하고 그냥 궁금해서 남겨봅니다 ㅋ

    • 주먹질의 경우 바로 앞에서 가격하니까 그렇죠. 하지만 기병창 싸움의 경우 그렇게 안 됩니다.

  4.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 내용이 좀 이상하네요.

    바로 위 도리도리님 말씀처럼.. 오른손 잡이가 공격을 한다면 상대방은 왼쪽에 공격을 받게 됩니다.

    아무래도 논리적으로 잘 이해가 안되네요.

    • 설명 추가했습니다. “나하고 상대방이 정확히 마주보고 싸우는 게 아니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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