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 장비에서 주력 장비로, 배서닛(Bascinet) (2)

14세기 중후반, Hounskull식 배서닛을 착용한 기사(재현).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8765199@N07/2327958444)

이렇게 1350년대 이후 정립된 배서닛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 본체, 목을 보호하는 애번테일(Aventail), 안면을 보호하는 바이저(Visor).

투구 본체

배서닛 본체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정점이 뒤통수 쪽으로 기울어진 원뿔 모양”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으신 분들은 프랑스 파리의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유물은 15세기 초의 것으로, 백년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단, 애번테일은 떨어져 나가고 없습니다.)

사진에서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배서닛은 투구 전체에서 곡선이 굉장히 두드러집니다. 사실 이것이 배서닛의 최고 특징이자 강점입니다. 이렇게 유연한 곡선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의 칼이나 창이 맞아도 미끄러져 나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1. 이런 건 원통 모양의 그레이트 헬름에서는 기대하기 힘들죠. 기사들만이 사용하던 그레이트 헬름과는 달리 배서닛은 계급이 낮은 사병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가볍고 간편하다는 것 외에도 이러한 방어능력도 한 몫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애번테일[Aventail]

앞선 포스트에서 쇠사슬 두건[coif]과 거기 연결된 작은 철제 모자[Cervelliere]가 갑옷 본체에서 분리되어 나오면서 배서닛이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배서닛의 투구 본체가 이 Cervelliere의 발전형이라면 애번테일은 투구 본체 아래에서부터 목까지를 방어하던 코이프의 후신입니다. 코이프가 쇠사슬로 만들어졌으니 애번테일 또한 자연히 쇠사슬로 만들어지게 되었죠.

애번테일은 처음에는 리벳을 사용해서 투구에 영구히 고정시키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투구 본체에 돌출된 Vervelles라는 철침을 사용해서 고정시키는 것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끈을 사용해서 철침과 Aventail 사이를 고정시키는 방법이죠. 이렇게 만들면 손쉽게 분해할 수 있기 때문에, 닦거나 수리하기 편리합니다. 아래 유물은 이러한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죠.

14세기 독일에서 만들어진 배서닛. 애번테일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투구 본체에 장착된 철심 위에 애번테일을 끼운 뒤 가죽을 덧대고, 그 위를 끈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사진에 나온 가죽과 끈은 현대의 복원품이다. 히긴스 아머리 소장. (*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gorekun/5456940205)

바이저[Visor]

여닫이식 안면 보호 장치인 바이저[Visor]는 흔히 중세 유럽 투구의 특징으로 여겨집니다만, 중세 중기를 넘겨서야 등장했으니 의외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유럽 전 지역에서 바이저가 사용된 것도 아닙니다. 독일이나 영국, 이탈리아 북부 등지에서는 바이저가 제법 인기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남부를 포함한 남부 유럽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기야 지중해의 푹푹찌는 온도와 습도를 생각하면, 얼굴 전체를 덮는 바이저 같은 건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2

바이저가 처음으로 시도된 것은 13세기 말 그레이트 헬름에서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만큼 그레이트 헬름이 가진 최악의 착용성은 큰 문제였던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실험적인 시도로 그친 것으로 보입니다. 바이저가 본격적으로 장착되기 시작한 것은 1330년대 배서닛이 독립된 투구로 등장하면서입니다. 독립과 동시에 초기 버전의 바이저들이 장착되기 시작했는데, 최초의 바이저들은 얼굴을 겨우 덮는 수준의 평평하고 동그란 원판 모양이었습니다. 바로 위 유물에서도 보이는 방식처럼 바이저 위쪽에 경첩을 위아래로 여닫는 방식이었죠.

이 초기 형태의 바이저는 오래지 않아 크랩바이저[Klappvisier]라 불리는 양식으로 정립됩니다. 실물은 저도 본 적이 없고 조각에 새겨진 것을 본 적이 있3네요. 하지만 이 방식은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만 조금 인기를 얻었을 뿐, 대세였던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체로 통용되는 표준적인 바이저의 모습은 하운드스컬[Houndskull], 혹은 Dog-Faced라 불리는 양식4이라 불리는 양식입니다. 맨 위 사진과 바로 아래 사진에 나타나 있는 양식인데요, 코 부분을 원뿔 모양으로 돌출시켜 착용감을 향상시킨 것이 특징입니다. 이 양식은 1340년대 이후 등장하여 1380년대 이후에는 완전히 대세로서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기존의 바이저들처럼 위아래로 여닫는 방식도 있지만 대부분 옆으로 여닫는 방식입니다. 좀 특별한 것으로는 힌지에 달려 있는 핀을 뽑으면 본체와 바이저가 완전히 분리되는 형태의 유물도 전합니다.5

15세기 초의 배서닛. 이 갑옷 세트는 현존하는 중세 갑옷 중 가장 오래된 풀세트이지만, 처음부터 세트였던 것은 아니고 같은 시기의 갑옷들을 후대에 조립한 것이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mharrsch/802256385)

이렇게 정립된 배서닛은 1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중세 유럽에서 표준적인 투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1. 현대에도 철모의 곡선에는 상당한 연구비가 들어간다. 이거 하나 제대로 만들어 놓으면 적 총알이 맞아도 튕겨나가기 때문. 

  2. 이건 배서닛 위에 덧쓸 그레이트 헬름을 따로 들고 다니는 기사들이나 바이저 같은 게 부담스러운 사병들 역시 해당된다. 

  3. 꽤 잘 만들어진 재현품

  4. 다만 이 이름은 현대의 연구자들이 붙인 것이고, 당대에는 그냥 바이저라고 불렀다고. 

  5. 이 경우 핀은 작은 쇠사슬을 사용해서 투구에 고정시킨다. 이러면 핀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