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그대만
글이 생각대로 잘 안 나오신다고요?
조사를 살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1.
지난번 글에서 내가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고치는 부분이 조사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도 안 밝히고 넘어가는 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예시를 몇 들어보겠다. 이렇게 소재 하나 또 득템
2.
- 우리의 일의 결과 (X)
- 우리 일의 결과 (O)
전자와 후자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후자가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일본어는 '의(の)'를 많이 끼워넣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지만, 한국어는 반대다. 지울 수 있으면 최대한 지우는 게 좋다. '의'의 경우 웬만해선 마지막 하나만 써도 다 된다. '을/를'도 마찬가지다. 의미가 통한다 싶으면 그냥 지워라. 실제로 상당수는 지울 수 있다. 훨씬 간결하고 읽기 좋은 문장이 된다.
3.
-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고치기 전)
-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고친 후)
상당히 유명한 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의 첫 대목. 작가는 며칠을 고민해서 저 한 글자를 고쳐 놨는데, 덕분에 미묘하게 의미가 변했다. 전자는 버려진 섬에 대한 부정적 뉘앙스를 내포하지만1 후자는 그런 게 없다. 그저 담담하고 냉정한 사실 기술일 뿐. 조사 하나를 고침으로써 김훈 말대로 더욱 스트레이트한 문장이 되었다. 그리고 극렬 김훈빠인 필자는 열광했다. 조사는 이렇게 문장 전체의 의미와 느낌을 뒤집어놓을 수 있다. 같은 자리에 2개 이상의 조사가 사용될 수 있다면 어느 쪽이 더 좋은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게 좋다.
4.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그대가, 그대만, 이 눈물 멈출 수 있어
슬픔은, 아픔은, 이걸로 충분하니까
이젠 제발 돌아와요...
- 아이유, 『그러는 그대는』
가장 좋아하는 예다. 조사 활용 끝판왕. 짧은 가사에 조사 몇 개만 바꾸거나 반복했을 뿐이지만, 이 안에는 최소한 3개의 표현법이 들어가 있다. 어째 중학교 국어시간같은 설명이 되어간다
- 반복법: '그대'를 반복하고 있음. 가장 기본적인 강조 기법.
- 점층법: '그대가' 뒤에 더 강한 뜻을 내포하는 '그대만'이 따라붙고 있음.
- 열거법: '슬픔'과 '아픔'. '은'을 반복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함.
- 덤: 각운. ("ㅏ, ㅡ")
5.
한국어는 기본적으로 조사를 단어 뒤에 붙임으로써 문법적 기능을 표시하는 언어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다양한 규칙과 암묵적인 기법들이 존재한다. 뒤집어 말하면, 이것만 어느 정도 활용할 줄 알아도 어디 가서 글 못 쓴다는 소리를 안 들을 수 있다. 내가 조사를 가장 열심히 들여다보고 또 고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덧붙여 개인적인 에피소드 하나: 위에서 언급한 아이유 노래를 처음 듣다 거의 전기 맞은 충격을 느끼고 작사가를 찾으러 달려갔다. 도대체 이런 엄청난 가사를 쓴 사람이 누구야?!
-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쑥대밭이 됐지만 꽃은 피더라." ↩
아아 글쓰기 고수…
감사히 잘읽고갑니다 하하
헐, 그 정도로 고수는 아니지 말입니다(;;)
원페이지 기획서를 쓸때와 비슷하네요. 불필요한 조사는 모조리 제거하고, 어려운단어는 쉬운단어로 바꾸고, 중복되는 내용과 문장들은 다시 손보거나 통째로 지워라..
이래저래 글쓰기는, 참 어떤면에서 버림의 미학같기도 하네요.
그런가요? :) 사실 저는 기술 문서를 작성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 경우에는 예시나 필요한 하이퍼링크를 적절하게 추가해 주는 것 또한 포함됩니다만… 어쨌거나 좋은 글을 쓰는 데 사용되는 원칙들은 특별한 스타일의 글을 쓸 때도 어느 정도 통용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미생 58화에서 말씀주신 것과 비슷한 글쓰기를 본 것 같군요: 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er/17729 :)
글에서 언급하셨듯, 좋은 기획서나 글이나 프레젠테이션이나.. 너무 많은 단어는 사람 눈을 피곤하게 하니까요. 적절한 예시,링크, 이미지의 사용이 참 중요한것 같습니다.
미생.. 참 보고싶지만 두려워서 못보는 만화인데요.
고어쿤님덕분에 처음으로 보았는데, 바로 저런고민.. 정말 머리털이 다빠질것같던 과거가 생각나는군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