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환상

글쓰기는 특별히 익힐 가치가 있는 재주인가?

단언컨대, 내 대답은 ‘NO’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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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저기서 글쓰기 강좌가 열리고 글쓰기에 관련된 책이 쏟아지는 걸 보니 과연 글쓰기가 세간의 화두이긴 한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인터넷 시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글쓰기의 가치가 재발견되었다는 진단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글쓰기가 사회적 관심이 대상이 되고 있는 건 단순히 글쓰기의 가치가 재발견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글쓰기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없다. 글쓰기가 모든 이에게 있어 필수적인 소양인 양 여겨지는 것도 잘못되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2.

우선 글쓰기가 왜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지부터 살펴보자. 틀림없이 인터넷이 발달하고 블로그와 같은 글쓰기 툴이 대중화되면서 내가 쓴 글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는 쓴 글을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신문이나 책 같은 인쇄 매체로 한정되어 있었고, 자기 글을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사람은 신문 기자 같은 전업 필자(소위 ‘글쟁이’)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의 발달이 글쓰기의 부흥을 이끌었다는 진단은 타당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이 빠져 있다: 왜 우리는 기존의 전업 필자들의 글들을 멀리하고 장삼이사인터넷에 쓴 글들에 열광하게 되었나? 단순히 접근성이 좋아서? 이건 반쪽짜리 설명에 불과하다. 단순히 접근성이 좋은 것으로만 치자면 신문 기사도 인터넷으로 유통되면서 – 심지어 포탈 화면 1면에 걸리면서 – 접근성이 좋아진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사의 수익성은 물론이고 영향력은 갈수록 추락중이다. 왜 그럴까?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우리는 기존의 글 유통 채널을 독점하고 있던 ‘전업 글쟁이’들이 얼마나 멍청한 인간들인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아마 요즘 대학생들에게 “옛날에는 논쟁을 하다가 누군가가 ‘신문에 나왔다!’ 고 하면 그 자리에서 논쟁이 끝났다.” 같은 얘기를 해 준다면 아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그만큼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신문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믿지도 않는다. 그럴 만도 하다. 전업 기자가 쓴 기사의 내용이 비전업 블로거, 그것도 해당 분야 비종사자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광고주의 의향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거나 수준 미달의 잡문을 기사랍시고 송고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예전 같았으면 다들 모르고 넘어갔겠지만 이제 사람들이 다 안다. 언론 보도 뿐만이 아니다. 대문호라 불리는 사람들이 해대는 뻘소리는 이제 하루가 멀다하고 실시간 중계되는 마당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글쟁이’들이 쓴 글이 설득력을 가지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글쓰는 솜씨만으로는 설득력을 확보할 수 없다. 글쓰기가 재조명받고 있는 이유도 상당 부분은 기존의 전업 글쟁이들이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소위 ‘글쓰는 솜씨’는 이렇게 그 한계가 명백하다.

3.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어떻게 해야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글의 첫째 조건은 설득력이며, 설득력은 구체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아마 한심할 정도로 설득력이 없는 글을 비하할 때 쓰는 표현으로 ‘뇌내망상’ 이라는 표현을 들어봤을 것이다. 글의 내용이 현실과 명백하게 배치되서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을 끄적거려 놨다는 얘기다. 나는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구체성을 잃어버릴 때 발생한다고 믿는다. 구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과 명백히 다른 판단을 철썩같이 믿거나, 논리 전개에 무리수를 두고 있는데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어떤 가치 체계라도 삶의 구체성 위에 건설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라는 어느 전직 언론인의 말은 정말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성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한 기초 조건이다. 구체성이 있다고 해서 좋은 글이 되는 건 아니지만 구체성이 떨어지는 순간 좋은 글은 끝이다.

앞에서 ‘글쓰기가 재조명받고 있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기존 글쟁이들의 글이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 이라고 했다. 나는 이러한 현상 또한 ‘구체성’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본다. 보직 순환이 상식인 시스템에서 훈련되어 전문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기자들이 어떻게 한가지 주제라도 구체적으로 보겠는가?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대단한 통찰력과 전문성이 있어서 복잡 다난한 현실의 구체적인 디테일을 잡아내겠는가? 나는 그래서 글쓰기가 세간의 관심이 되는 현상 역시 약간 다르게 바라본다: 글쓰기만을 연마한 사람이 어떤 분야를 살펴보는 것보다, 이미 해당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글쓰기를 연마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는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는 거다. 이렇게 글쓰기는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어떤 분야가 됐든 그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효력을 발휘한다.

4.

이런 의미에서 나는 글쓰기가 모든 사람이 익혀야 할 필수적인 소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1가 됐든, 구체성을 담아낼 수 있는 시각이 생긴 다음에 글쓰기를 익혀도 늦지 않다는 얘기다. 내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묻는 사람들2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그거다: 글을 쓰기 전에, 굳이 글로써 표현해야 할 생각은 있는지 그리고 그 생각이 그만큼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를 자문해보라는 거다. 둘 중 하나라도 No라면, 굳이 글 같은 걸 쓸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


  1. 대단한 것일 필요도 없다. 나는 외국 덕후들의 잉여짓(…)을 가지고도 블로그를 하나 운영하고 있다. 잉여인증 
  2. 애시당초 작은 블로그 하나 운영중인 기술자한테 그런 걸 왜 묻는지가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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