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장도박물관을 가다
2006년 8월 25일 오전 10시
전라남도 광양
"아 왜 전화를 자꾸 끊어!!"
박용기 옹(75·중요 무형문화재 60호)과의 첫 만남은 별로 좋지 못했다. 어제 저녁 광양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찜질방에서 보내..려다 찜질방이 수리 들어가는 바람에(가는 날이 장날 -.-;) 졸지에 게임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장도박물관으로 가는 길을 몰라 길을 문의하러 장도박물관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연결 상태가 안 좋아서 자꾸 끊어지는 것이었다. 역정을 내실 만도 하지 -_-;
광양여고 앞으로 오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택시를 얻어탄 나는 얼마 뒤 장도박물관에 도착했다. 장도 하나 볼려고 서울에서 광양까지 찾아온 아해가 어지간히 반가우셨는지 나는 시원한 수정과도 한 잔 얻어마면서 박용기 옹에게서 직접 장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이를 위한 장식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도라고 하면 사대부 계층의 여성들이 정조를 지키기 위한 용도로만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편견이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다. 동국신속 삼강행실 제3권에 보면 "경상도 함안군에 사는 신씨 부인은 이희지의 아내로 왜란 때 항상 장도를 가슴속 깊이 품고 다니다 왜놈이 겁탈하려는 위기를 맞아 장도로 찔러 자결하였다." 라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장도를 여성들의 정조를 지키기 위한 용도만으로 한정해서 생각하는 것은, 조선의 병사들이 갑옷을 걸치지 않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드라마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장도는 일상적인 소지품 혹은 장신구에 가까운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사대부의 성인이면 장도를 일상적인 소지품으로 휴대하여 잡용 - 요새로 치면 커터칼 - 으로 사용하였고, 평민들도 많이 휴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인식을 치른 아들에게 부모가 장도를 선물하는 것도 하나 이상할 일 없는 것이었다. 장도는 환도와 마찬가지로 허리에 찰 수도 있고 가슴의 옷고름에 찰 수도 있지만, 여성들의 경우에는 후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디에나 있는 일용품인 만큼 장도와 장도장의 분포는 전국적이어서 조선 시대에는 어디에서나 장도와 장도장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역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재료에 차이가 있고 또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이다보니 자연히 지역에 따른 특성과 개성도 있었다.
장도의 몰락
그러나 근대화의 폭풍 속에서 사람들이 차츰 장도를 멀리 하면서 이들은 하나 둘 사라져가, 지금 남은 이는 중요 무형문화재 60호 장도장으로 지정된 박용기 옹과 낙죽장도를 만드는 한병문(韓炳文) 선생 둘 뿐이다. 이 외에도 몇 분의 지방 무형문화재가 생존하나 여러 종류의 장도를 만들 줄 모르고 특정한 장도만을 만들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장도장이 몇몇 안 남았다 해도 이들에게서 장도 제작 기법이 부지런히 전수된다면 크게 걱정할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여의치 않다. 주변을 살펴보면 장도를 가진 사람은 사실상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애시당초 시장 자체가 형성되지 않으니 장도장이 먹고 살 방법이 없는 게 당연하다.
박용기 옹 스스로도 엄청나게 고생을 많이 한 분이다. 왜정시대 말기, 월급은 고사하고 선배들에게 맞아 가면서 장도 제작 기법을 전수받은 건 이야기 축에도 못 낀다. 1978년 중요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고 보조금을 받기 시작했지만 장도를 만들어 먹고 사는 게 불가능했기에 낫과 쟁기 같은 농기구까지 만들어야 했고, 그마저도 모자라 물려받은 재산을 다 날려야 했다.
스승에게서 기술을 온전히 전수받은 유일한 인물인 박용기 옹이 마당이니 그 이상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이젠 장인의 자식들도 기술을 전수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장도 제작 기술을 전수받는 데는 무려 15년이 걸린다.
한시간 여 동안의 관람을 마치고 아드님이자 수제자인 박종군 선생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나오며 나는 기념품점의 엽서 한 팩을 빼들었다. 주머니 가벼운 내가 할 수 있는 건 겨우 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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