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따금 대뇌 피질이 얼얼해지도록 혼을 빼 놓는 영화가 있되, 내게는 가 그런 영화였다. 그리고 그 얼얼함의 대략 팔할 칠푼은 조커 때문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히스 레저의 넘사벽급 연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 조커는 기존의 악당 캐릭터에 비하자면 차원이 다른 놈이다. 이놈은 진짜 막나가는 놈이고, 한 마디로 대책이 안 서는 인간이다. 잔인한 것으로 치자면 조커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악당들이 널리고 널린 게 영화라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이런 놈은 없었다. 이놈은 "계획 따위는 절대 세우지 않으며, 꼴리면 걍 죽여 버리는" 예측불허의 화신이고 - 간단히 말해서, 그냥 미친놈이다.

짝짝짝...

얼얼한 머릿속에 닥터 페퍼라도 부어야겠다 싶어 들어간 슈퍼에서, 나는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조커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는 떠오른 사람은 이글루스에 게이 컨셉으로 블로그를 운영중인 블로거, M이었다. 평소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인정 사정 없이 타작질을 하는 모습이 흡사 조커의 난장판하고 비슷했다. 그 친구가 얼굴에 조커 화장을 하고 "Why so serious?" 라고 읊조린다면 진짜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모르지만.

2.

한 달도 지난 일이 갑자기 떠오르게 된 것은 지난 10월 중순이다. 일정과 코드 속에서 헤엄치던 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M이 자기 블로그를 폐쇄하고 잠적했다 - 속칭 캐버로우 탔다는 것이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일의 내역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온라인상에서 알게 된 연상의 여인 H한테 작업을 걸었다가 차이고, 앙심을 품고 그녀에 대해 악소문을 퍼트리다가, 소문을 듣고 찾아온 H가 M이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 시작하자 캐발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 그의 블로그에는 소위 "싹싹 비는 글" 하나만 덜렁 걸려 있었고, 그나마 이것도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 정도 가지고 소위 "캐버로우"를 탈 정도가 될까? 내 생각은, 충분히 그럴 만 하다는 것이다. M이 온갖 광대(joker)짓 - 인정사정 없이 상대를 난도질하는 걸 포함해서 - 을 하면서도 오히려 기세가 등등했다. 왜? 사람들이 M의 "광대짓" 을 보면서 즐기는 사람, 혹은 추종자가 꽤나 많았기 때문이다. M이 추종자를 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타작질 받을 만 한 놈을 제대로 타작질한다." 는 점이 한 몫 했다. 문제는, 이제 이것도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얼마 전 M은 Y라는 인물을 공격한 적이 있다. Y는 몇년 전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경찰조사까지 갈 정도로 걸판진 싸움인지라 나도 꽤 흥미 있게 구경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M은 "Y 될뻔하다 만 놈" 이라는 타이틀을 걸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M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광대짓을 못하게 되었다. "타작질 받아야 할 놈" 주제에 무슨 놈의 타작질인가? 광대짓을 못하는 M은 더이상 M이 아니다. 덧붙여 이 정도 개망신을 떨었으니, 잠적하는 수밖에.

3.

조커가 조커짓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거리낄 게 없는 이유도 간단한데, 조커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계가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가 없는데 거리낄 것이 생길 리 없다. 약점을 잡힐 일도 없다. 조커가 막나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M 또한 막나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찌나 막나갔는지, 그의 행적이 시사 주간지에 실릴 정도(!!)였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 (좋은 의미든 아니든)유명세를 타고, 이런저런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더이상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 동인녀한테 꼬리를 치다가 개망신을 떨리고 처참하게 밟혔다.(적어도 그렇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언젠가부터 M에 대해 "겉으로 보면 예상 외로 멀쩡한 훈남이다." 라는 소문이 퍼졌다. 만화 관련 행사나 이글루스 유저 모임 같은 데서 그를 본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인 듯 하다.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냥 의외다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이번 사태의 전조였다는 생각이 든다. 온라인 상의 인물들과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얘기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순간, 광대짓은 끝이다.

4.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이름난 광대 하나가 갔다. M은 신체검사에서 1급 나온 건장한 장정이라고 하니, 앞으로 2년 동안은 총 들고 박박 기는 수밖에 안 남았다. 그가 온라인상에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돌아와도 이전만큼의 포스는 절대 못 보여 줄 거라는 건 거의 확실하다.

이런 걸 보다 보면, 소위 인터넷에서 광대짓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기야, 쉬우면 그게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