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1.
지금은 거의 발길을 끊었지만, 한때 내가 인터넷에서 가장 즐겨 찾았던 곳은 다음 등지에 있는 역사 카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책냄새나는 소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적다. 그렇기 때문에 몇 안되는 카페는 내게 사막 속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아직 꼬꼬마였던 나는 인터넷에 접속하면 오아시스로 달려갔다.
그곳이 처음부터 오아시스였던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캐러밴들이 있었다. 자신이 가진 컨텐츠를 업로드해주는 고수들 말이다. 고수들이 모여 있으면 볼 만한 컨텐츠는 넘쳐1났다. 캐러밴들이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이 솟는 건 놀라운 이적이었다. 우물가에서 물 한 바가지를 퍼 마시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
그런데 그 오아시스들의 흥망성쇠란, 대략 비슷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몰락은 그들의 명성에서 시작되었다. 좋은 오아시스 - 소위 "물 좋은" 카페 - 라는 소문이 돌면, 명성을 듣고 몰려온 가입자 수가 크게 늘어난다. 분명 축하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걸 아는 데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회원이 늘면서 관리가 힘들어졌다. 정성을 들여 정리해 놓은 자료들은 어지럽혀지고, 토론 게시판에는 수준 낮은 글들과 함께 유입된 찌질이들이 활개를 쳤다. 그러다보면 싫증을 느낀 고수들은 먼저 짐을 싸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그곳이 사막 속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던 이유는, 컨텐츠를 업로드해 주는 고수들 덕분이었다. 고수들이 떠나고 컨텐츠를 업로드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곳은 더이상 오아시스가 아니었다. 남은 건 말라버린 우물과 쓰레기더미. 그렇게 몇몇 카페가 폐촌이 되었다. 오아시스를 등진 캐러밴들은 어딘가로 옮겨가서 새 둥지를 차렸다. 그리고 앞 과정을 처음부터 반복2했다.
처음엔 나도 캐러밴들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결국 지쳐버렸다. 계속 캐러밴 무리를 따라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천막 하나 치고 주저앉기로 했다. 선배의 조언에 따라 블로그를 개설했다. 벌써 5년 전 얘기다.
3.
나는 짧은 생각을 올리는 매체로서 미투데이(이하 미투)를 애용하는데, 이곳은 최근 이용자 수가 크게 늘었다. 이곳을 인수한 네이버가 YG 엔터테인먼트와 제휴를 맺고 소속 가수들의 미투데이를 개설했기 때문이다. 한 힙합 가수가 글을 올리자, 덧글을 달기 위해 팬들이 몰려왔다. 그날 하루, 지금까지 미투데이에 가입했던 유저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 가입했다.
사람이 크게 늘면서 이전부터 있던 유저들의 입에서는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가수에게 약간이라도 부정적인 발언을 하면, 팬들이 몰려들어 듣기에도 민망한 욕설을 퍼부으며 분위기를 흐렸다. 이곳저곳에 무성의한 리플들을 싸고 돌아다녔다. 신규 유저라 시스템을 잘 이해 못하는 건 알지만, 이렇게 몰려다니며 분탕질을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오손도손하게 의견을 나누고 서로 공감하던 미투는 며칠 사이에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신규 유저들이 싫다, 종족이 분화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고 심지어 미투따위 집어치우고 트위터로 옮기겠다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실제로 그 말을 한 상당수가 정든 미투를 접고 트위터로 옮겨갔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었다.
4.
내가 가진 신념들 중 하나는 바로 "다양성에 대한 신앙" 이다. 질 높고 다양한 생각이 어우러져서 새로운 생각과 유용한 통찰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어우러지는 대상에는 이름 높은 학자의 생각도 있을 수 있고, 동성애자 영화감독의 생각도 있을 수 있다. 내가 블로고스피어를 좋아하는 것은 실로 이러한 다양성 때문이다.
질적인 다양성은 기본적으로 물리적 수량을 필요로 한다. 일단 수량이 부족하면 질적인 다양성도 나오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리적 수량이 반드시 질적 다양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질적 다양성을 잠식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각종 메타 블로그에서도 어느 순간부터 선정적인 컨텐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질 높은 컨텐츠도 선정성이 떨어지면 이용자들이 클릭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대표적 인 예라 할 만하다. 사실 메타 블로그에 발길을 끊은 지도 꽤 오래 됐다. 하지만 한때 즐겨 가던 곳이 그런 식으로 망가져가고 있다는 소식은 마음이 무거워지기에 충분하다.
질적인 다양성과 물리적 수량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은 대체 어디일까.
아 정말 적절한 비유인거 같네요
사실 그래서 몇몇 카페나 동호회 운영자분들께서는
더이상의 외부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오아시스를 구축하기도 하시죠
그게 곡 나쁜것만은 아닌거 같네요
예,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저는 그 분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런 폐쇄적인 운영이 늘어난다면 좋은 정보가 전파되는 데도 한계가 생기고, 무엇보다 비슷한 생각끼리만 동종교배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꼴이 되겠죠. 그러한 사태를 우려합니다.
당장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전… 포털이라는 것이 등장하기 전에.. 정말 많은 논문자료 등 진귀한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웹에 접속하여 조금만 수고하면 얻을 수 있었죠.
그러던 것이… 포털이 등장하면서 그 진귀한 자료들이 뒤로 사라지고 찌질한 답변만 남았죠.(가장 짜증나는게 네이버 지식인입니다. 얼토당토 않은 답변들.. 심지어 짱퉁 의학관련 답변 때문에 죽어나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우스게 소리도 있답니다.)
거기에 더해서 스폰서 링크니 스페셜 링크니 해서 내 눈을 오염시키는 광고들….
웹이란 환경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에 반해 질은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점점 블로그 스피어도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슬프죠…. ㅠ_ㅠ
수적으로는 모자란 점이 많았지만 질적으로 진귀한 자료들의 비중이 높았다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포털이 등장하고 이용자들이 급증하면서 평균적인 수준은 크게 내려갔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용자 수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막장화 되어가는 게 일종의 수순인 것 같습니다. 블로고스피어도 조금씩 DC화 되어가더군요.
DC 역갤이 그 역사를 경험했죠. 예전에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찌질열전 DC의 몇 안되는 개념갤이었다고 하는데, 풍Q와 마광팔을 비롯한 찌질이들이 유입되면서 역갤에서 놀던 개념 고정닉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지금의 역갤은 일빠나 서양빠, 환빠들의 고향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물을 마시고자 손을 담갔을 땐 이미 썩은 구정물이더라고요.
역갤은 그 막장화의 행적이 거의 전설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역갤이 한창 잘 나갈 때도 책 정보를 얻기 위해서 방문한 것일 뿐, 깊은 정보는 기대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역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분들에게 막장화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예, 도라버리게스님 말씀대로 썩은 구정물이 정확한 표현이겠죠.
오랫만에 놀러왔다가 좋은글을 읽고 가네요. 태그가 참 맘에 드네요 집단지성이라….
집단지성이 발생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 잠시 생각이 미쳐서 끄적거려 보았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
collective intelligence와 관련해서는 다음 글을 한 번 일독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http://blog.jinbo.net/marishin/?cid=13&pid=293
좋은 글 소개 감사합니다. 집단지성의 개념과 그 발현을 위한 전제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네트워크는 잘 들어가지 않아서 놓치고 넘어갈 뻔 했네요.
먼저 집단지성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저도 집단지성이라는 tag를 붙이긴 했습니다만, 엄밀하게 말해서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공학적으로 집단지성이란 무의미한(?) 데이터의 방대한 집합에서 일정한 규칙성을 찾아내는 수학적 방법론인데, 이 경우 개개의 데이터 수준에서는 그 결과물을 절대 예측할 수 없거든요. 반면 위키피디아 같은 것들은 어느 정도 그 결과물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엔 집단협업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텐데, 포괄적으로 집단지성이라고도 하더군요. 제가 글쓴 예는 포괄적 집단지성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소개해주신 글에서는 지성과 지능까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는데, 공감합니다.
다음으로 “영웅 따위에 휩쓸리지 않는 개인의 비판적 지성”이 집단지성의 중요한 발현 조건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진중권도 “돌무더기 가득 쌓아 놓는다고 거기서 어떤 지성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한 적이 있지요. 확실히 박정희든 노무현이든 미네르바든, 영웅의 출현에 목말라하는 분위기는 비판적 지성을 작동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아시스라길래 요새 한창 탈퇴네 불화네 시끄러운 밴드 오아시스인줄 알았더니 말이죠’ㅅ’
흠 그게 사실이라니 좀 무섭군요 :-)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미꾸라지 한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양화를 구축하는 건 대단히 어렵습니다. 몇년 동안 열심히 축적하고 유지한 것들이 외부의 악화에 의해서 쉽게 무너지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더군요. 그러나 그렇다고 외부의 악화를 막기 위해서 폐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하게 되면, 그건 동종교배를 뛰어넘어서 거의 근친상간의 분위기로까지 흘러가서 오히려 외부의 악화가 들어온거보다 못한 경우도 발생합니다(최근 엔하 위키 건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어느정도 축적된 정보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나 사용자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거나, 인터넷 전반에 적용될 수 있는 공통의 법칙이나 코드가 있어서 그 범위 내에서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한 이런 문제는 계속 반복되리라 생각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러나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에 공감합니다. 동종교배의 위험성 등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을 잘 정리해 주셨네요.
결국 양화를 생산하는 소수와 생산하지 않는 다수의 관계 설정의 문제로 넘어가는데, 어느 정도의 공통된 법칙이나 코드 안에서 교류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학계 같은 곳은 학위와 같은 라이센스가 비슷한 구실을 하는 것 같더군요. 인터넷에도 비슷한 종류의 질서가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것이 좋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엔하위키는 요즘 무슨 일이 있나요? 저도 거기 한 번 들어가면 거의 나오지를 않는데;;
저도 오아시스 보고 밴드 오아시스인줄 알았습니다 -0-
솔직히 미투데이에서 보인 VIPPER들의 행태는 참 보기 추했습니다. 아이돌 팬덤의 어두운 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였달까요.
제 미친인 호크윈드 님의 포스트가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Idol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은 사람은 천재다.” http://me2day.net/hawkwind01/2009/08/18#12:32:59
엔하위키건을 모르고 계셨나 보군요. 자세히 설명하기는 그렇고, 그냥 찌질열전을 보시면 됩니다.
시민 A 사건, 혹은 엔하위키 친목질사건이라고 하지요.
헉…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