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예의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예의는 삶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1.

"그렇지만 손님, 지난 세월동안 제일 많이 변한 건 그게 아냐. 사람이지. 사람 ... 요즘 대학생들이 오십년 전 그 시절에 목숨을 내놓고 살던 우리하고 똑같은 나이라는 게 참말 믿어지질 않아."

소설책을 넘기다 한 구절에 눈길이 멎었다. 한때 검객이었던 노인이 신문기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 중이다. 그리고 불만을 터트린다. 요즘 - 그러니까 현대 젊은이들은 영 철부지 같다고. 아직 전근대였던, 자기 젊었을 때는 안 그랬다고.

노인들이 흔히들 하는 불평이지만, 왠일인지 이 한 마디에만은 동감을 표하고 싶었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화 『바람의 검 신선조』의 한 장면. 아사다 지로의 『미부 의사전 (壬生義士伝)』이 원작이다. 한국에는 『칼에 지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역사책을 뒤지다 보면, 이따금 드는 생각이 있다. "옛날 옛적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네." 정말이다. 전근대의 기록들을 읽다 보면,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릴 일을 간단히 저지르는 걸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자기 명예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질 않나, 은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스스로를 불구로 만들질 않나. 요즘 사람이라면, 저렇게 괴로운 짓을 하느니 그냥 잊고 편하게 사는 편을 택할 것 같은데 말이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을까. 나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2.

옛날에는 사람들이 죽음을 인식할 기회가 많았다. 영아 사망률은 높았고, 평균 수명은 짧았다. 죽는 이유도 다양해서, 비명 횡사나 집단 학살을 심심치 않게 구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물건이라는 게 지금과는 달리, 손으로 일일이 만들어서 대대로 물려 쓰는 것이었다. 당연히 죽은 이의 손길이 닿았던 것들, 죽은 이들을 떠오르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죽음이란, 언제나 일상 곁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세간에 넘치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삶과 젊음에 대한 이야기 뿐이다. 의학의 발달로 잘 죽지 않게 되었고, 쓰는 물건이란 언제나 대량 생산된 새것들이다. 덕분에 어지간히 나이가 들지 않는 한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세상이 풍요로워진 것은 틀림없이 좋은 일이지만, 과연 모든 면에서 항상 좋기만 한 것일까.

김태권 화백이 그린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이 글을 처음 쓸 때까지만 해도 내가 가장 좋아하던 판본은 중세의 수서화 버전이었고 자연히 이 자리에도 중세 수서화가 들어와 있었지만, 이 글을 완성하고 난 뒤 몇 달 뒤인 2010년 11월 바뀌었다. 아무래도 현대 한국인 눈에는 김태권 화백 버전이 좀 더 친근하기 때문.

사람이란 모자람을 느끼기 전까지는 귀중함도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우리는 숨쉬는 공기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평소 잘 안하지 않던가.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이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문제라고 해서 다를까? 언제나 죽음이 곁에 있던 시대, 사람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진중하고 무게가 있었다.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언제나 부끄럼 없는 삶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이리라. 비록 삶과 죽음은 반대 개념이긴 하나, 삶이 곧 죽음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결국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식일 터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요즘 나이 서른이면 아직 애다. 옛날 같았으면 영감 소리 들었을 나이인데 말이다. 그런가하면 요즘 노인들이 옛날만큼 지혜나 연륜을 보여 주는지도 의심스럽다. 오죽하면 "요즘 노인들 버르장머리 없어서 큰일이다." 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이런 마당이니 삶에 대한 진중함이 있을 턱이 없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사라진 자리에 삶의 진중함 또한 사라졌고, 사람들은 조무래기가 되어버렸다.

3.

숱한 죽음이 지나갔다. 어떤 가수는 먼저 간 누나를 따라갔고, 서해에서는 군용 헬리콥터가 추락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크게 느껴지는 죽음은, 침몰한 해군 함정에서 죽어간 마흔 여섯개의 죽음일 것이다.

오늘, 그 마흔 여섯 명의 장례식이 있었다. 찬찬히 명단을 살펴봤다. 사병들은 대개 나보다 어린 나이고, 부사관들이라고 해봐야 내 또래 정도다. 쪼개진 배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 희생자들이 느꼈을 무한의 공포를 생각하니 절로 목덜미가 서늘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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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동안, 죽은 자에게 애도를 표하는 만큼이나 죽음 그 자체에도 예의를 차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테니까. 삶에 대한 무례함이란 곧 그 삶을 갈망했던 사람들에 대한 무례함과 다를 바 없을 터다.

4.

당신들이 내 삶의 한조각을 그토록 갈망했음을 잊지 않겠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