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한 율법
1.
"너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
예수가 로마 병정들에게 잡혀 가자, 제자들은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졌다. 베드로도 사형당할 것이 두려워 도망을 쳤는데, 몇몇 사람이 그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예수의 제자로군요." 베드로가 답했다. "나는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오." 그가 스승을 세 번 부정한 순간, 새벽닭이 울었다. 때마침 예수가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난 베드로는 슬피 울었다.
흔히 예수의 예지력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배경이 있다. 이 일화의 주인공인 베드로는 예수에 의해 수제자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다. 에서 12사도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며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선포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지금도 천주교에서 초대 교황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신의 대리인 제 1호"가 저지른 "찌질한 행각"의 스냅 사진인 셈이다.
2.
저런 덜떨어진 친구를 수제자로 내세우다니, 사람의 아들이 실수를 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의 말과 행동에 비추어 볼 때, 저런 덜떨어진 친구를 수제자라 한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르침 자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오기 전, 율법은 유대인들을 위한 신의 율법이었다. 구약의 야훼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인간에게 율법을 내려 주는 절대적인 존재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주변 민족이나 율법을 저버린 유대인들에게 가차없는 엄벌을 내린다. 유대인만을 위한 질투와 분노의 하느님, 그것이 구약의 야훼고 그의 율법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율법은 모든 인간을 위한 사랑의 율법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화한 것이 인간이라면, 율법은 바로 그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공포와 폭력으로 다스리는 구약의 율법은 사막의 조그만 유목민 집단이 질서를 유지하기에는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의식하는 세계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 기원 전후의 세계에서, 이런 잔인한 율법은 유혈사태만 부를 뿐 인간의 행복에 기여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인간이 행복한 세상은, 결국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인간들이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이들은 간통한 여인을 돌로 칠 자격도 없을 만큼 죄가 많으며, 죽음이 두려워 스승을 부정할 만큼 겁도 많다. 이런 인간들에게, 적당한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너희는 어차피 불완전하고 흠 많은 인간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라." 저 덜떨어지고 겁 많은 인간을 후계자로 낙점한 건, 이제 앞으로의 세상은 너희 인간들이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였을 게다. 사람의 아들에 비해 한없이 모자란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니까.
3.
인간의 역사는 인간 개념 확대의 역사다. 까마득한 수천년 전, 인간은 근처의 몇몇 존재들만을 인간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인류는 겨우 수백년 전만 해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남을 인간이라 보지 않았고, 당당히 학살을 자행했다. 끝없는 학살과 학살의 끝에 인간은 보편적 인권의 개념을 발명하게 된다. 이런저런 조건으로 인간을 규정짓는 한,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일제의 남경 대학살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권 - 혹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당연한 권리가 생겨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세상 돌아가는 행태를 보면, 인간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얼마나 체득했는지 심히 의문스럽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다. 인간이 종교나 인종 등 "타고난 정체성"에 따라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 - 이것은 그 죄 많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그나마 이루어 낸 성과다. 물론 이 정도로 예수가 설파한 사랑의 가치를 실현하기란 코끼리 입에 비스킷 수준일 게다. 하지만 최소한 이러한 개념을 가짐으로써, 인간은 더 큰 사고가 터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4.
최근 기독교가 자주 구설에 오르고 있다. 대형 사찰 안에서 깽판을 놓은 것도 모자라 차별 금지 법안에 반대까지 하고 나섰다. 그 이유가 가관이다. 이 법안은 "동성애는 죄악이니까 차별받아야 한다." 는 거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거짓 증거들을 내민다. 동성애는 전염된다는 둥, 동성애자는 생활이 문란하여 가정을 파괴한다는 둥, 동성애자에게 입양된 자식 중에는 정신병자가 많다는 둥...
이런 행태를 볼 때마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근거로 들어 동성애자를 박해하라고 생떼를 쓴다. 하지만 특정 정체성을 근거로 차별을 하지 않아야 함을 깨달은 것이야말로 인간의 이성이 이루어낸 작은 성과다. 이것도 이해 못하면서 예수의 더 큰 사랑과 용서를 본받겠다는 것, 이것이 오만과 만용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솔직히, 동성애자를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되도 않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타인의 존재를 죄악으로 몰며 악을 쓰는 행태를 보면, 저들에게서 사람에 대한 사랑 혹은 인간의 지혜에 대한 고려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는지 궁금하다. 그 어느 것도 사랑의 율법을 설파하던 사람의 아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탓이다.
5.
과문한 탓인지, 나는 인간에게 율법을 내려 주는 절대적인 존재가 과연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역사적으로 예수라는 인물이 과연 존재하기나 했는지조차 의문이다. 설령 있었다고 한들, 그가 하느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그의 율법이 과연 옳은지 확신할 도리가 없다.
허나 그러한 존재가 있어 인간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면, 천상의 그분은 화석이 된 율법의 편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의 편에 선 자들의 손을 들어 주시리라 확신한다.
ps. 고해성사 받은 지 10년이 넘은 죄 많은 인간이 이런 글을 써도 되는지 몰라.
지저스 본인도, 자신은 율법을 완전케 하기위해 온 이라고 하셨죠.
크리스천이지만, 요즘 한국 기독교를 보면 “왜 당장 최후의 심판이 안올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법은 핍박이다라고, 누군가 말했다죠?
동의합니다. 저 또한 예수란 인물은 애당초 야훼와의 오랜 계약이 인간을 이롭게 하자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것을 비판했던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율법은 기존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근데 율법 말씀이 일점 일획도 어긋나지 않고 실현되게 하려고 온 친군데, 그게 과연 사랑의 율법인지는 의문이네요.
성서를 보면 예수 스스로도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왔다.” 고 하지 않습니까.
율법이란게, 구약시대의 천국 가는 방법인데 이게 심히 “지켜봐, 못지키겠지? 너희 엿 좀 먹어봐라 헤헤”스럽지요.
그리고 지저스의 죽음으로서 천국 가는 문이 열리지요. “율법”이 완성되죠.
말하지면 지저스의 존재란 천국 이민법 개정안이지요.
게이는 좋은겁니다. 임자 없는 여자들이 늘어나거든요.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모른다니까요.
……가만. 그런다고 내 여자가 생기는게 아니잖아?
정정. 게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Q. E. D.
아 씨바, 반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게이는 그렇다 치고, 레즈비언은요?
사이코 // 레즈비언에 대해서야…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
음… 레즈비언은…. 음….
“흥! 어차피 저 여자는 별 볼 일 없는 여자일 게 뻔해!”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이것이 정신 승리인가!! (??)
카톨릭의 부패와 권의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탄생한 개신교가 더더욱 권의주의로 가버리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혁명을 일으키려한 이유가 종교를 순수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니 권력 나 다오’란 속셈에서 악용한 후계자가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적어도 마르틴 루터가 잘못생각하고 행동했었다곤 생각하지 않거든요.
사실 저는 천주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권력과 손을 잡는 순간 타락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치 권력이든 경제적 권력이든지요. 저 또한 종교 개혁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생각해 보면… 뭐, 시간이 가면서 맛이 가는 것이야말로 세상사의 보편 법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이따금 합니다. (오늘 보니까 개신교가 헌금으로 은행 설립한다 어쩐다 하는 말이 나오는 것같습니다.)
사실 천주교도 세속 권력과 손을 끊으면서 다시 살아났죠. 그런 점에서 제 짧은 생각엔, 정치 권력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종교가 종교 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권력과 결탁한 순간부터 종교란 선하게 살기위한 지표가 아닌 권력유지의 도구로 쓰이니 할말 다했죠. 내세에서의 구원을 내걸면서 현세에서 잘살기를 우선한다는 것처럼 종교에서 보이는 많은 이들의 자기모순행위가 없는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긴요, 반대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네요.
예수님이 잡히시고 모두들 도망가서 숨었는 데, 그나마 베드로만이 멀치감치에서 쫓아가며 상황을 살펴보았다는 거죠. 그러다가 일부 사람들에서 발각(?)되었던 것이고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겁장이어서가 아니라 제자들 중에 가장 용감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한 거죠.
요한복음에 보면 베드로만 안나스의 집에 들어간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곧 요한도 같이 안나스의 집에 들어간것으로 나옵니다.
네, 요한 복음에는 한명이 더 들어갔군요. 아마 ‘빽’이 좀 있던 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5절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절
베드로는 문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사이코, Manglobe // 예, 물론 요한의 복음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요. 하지만 말이죠… 요한의 복음서는 그대로 신용하기가 힘든 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서학자들은 4복음서가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해서, 대개 마르코 → 마태오, 루가 → 요한의 순서로 쓰여졌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 네 권은 이야기가 비슷합니다만,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마르코의 복음서에 쓰인 부분을 그대로 “베낀” 부분이 있구요, 루가의 경우 유태 대반란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저자가 알고 있었던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리고 마지막 요한의 경우, 아래와 같은 특징들을 보입니다.
– 다른 복음서들에는 없는 논리적 인과 관계가 강조된다는 점. 예를 들어 유태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간 이유를 “유태인들에게는 정치범을 재판할 권한이 없어서” 라고 명시하는데, 이것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음.
– 문학적인 양식들이 보인다는 점. 예를 들어 예수의 발언이 문어체로서, 꽤나 장황하게 묘사됨.
위와 같은 이유로, 요한의 복음서는 많은 신학적 발전이 이루어진 뒤,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대략 AD 90년경 이후에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사료적 가치로 보면 “직접 목격한 사람에게서 들어서 썼다” 는 마르코서 등과 같은 수준이 될 수 없는 셈이지요. 따라서 이 사건은 그 전에 쓰여진 다른 복음서들의 기록이 좀 더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신의 대리인” 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점에서 논지에는 변화가 없다고 봅니다.
ps) 두분 다 교회 다니시는 분 같군요.
기독교는 이렇게 일간지에 광고내고 데모하러 다닐 여력으로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으면 좋겠군요. -_-;;
저도 동감입니다. 동성애자를 박해하거나 화려한 교회를 짓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의 반만이라도 그런 데 신경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젠 헌금 받은 것으로 은행까지 만든다면서요?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뭐 우리나라 교회들은 목적이 이상하게 변해버려서,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잡아놓고 교회나오라고 하면서 안가면 지옥간다고 하지를 않나, 교회다닌다고하면 자기 교회가 더 좋다고 종교차별드립을 하지를않나, 장기기증으로 받은 장기를 뒤로 빼돌려 돈을 챙겨버리질않나, 사찰에가서 사탑을 훼손하지를않나, 이슬람 믿고있는 나라에가서 개종을 하라강요하지를않나,(이슬람에서는 다른종교는 허용되도 개종은 사형감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가서는….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개념을 내다버린 신앙은 광신인 법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