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의 탄생 (2) – 수도사가 된 기사들, 템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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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의 사정
1199년 7월, 1차 십자군은 이라크 자유 작전예루살렘을 함락시킨다. 많은 이들이 유럽으로 돌아갔지만, 돌아갈 생각이 없는 모험자들 - 주로 프랑스인들이었는데 - 은 팔레스타인에 남아 유럽식 봉건 국가를 탄생시켰다. 이른바 십자군 국가, 혹은 라틴 시리아lLatin Syria라고 불리는 국가들이었다.
문제는 이라크 군의 무장해제전후처리였다. 1118년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 1세가 승하했을 때, 예루살렘 왕국의 치안은 완전 엉망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후세인 정권 제거원정이 성공하긴 했지만, 적대적인 피지배민 사이에 끼인 한줌밖에 안 되는 미군유럽인들1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부터 통해야 일단 공권력이 사회를 장악할 것 아닌가?
아니, 차라리 그 정도만 되었어도 꽤나 좋았을 것이다. 애시당초 십자군의 상당수는 살인이나 강간 등 강력 범죄에 대한 사면을 위해 원정에 투신한 자들이었다.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성지에 왔다고 해서 이들이 새 사람이 되었을 리 만무했다. 당장 하던 짓을 다시 시작했다. 1번 타겟은 성지로 순례를 온 순례객들이었다. 이들은 순례를 위한 돈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대개 혼자 여행하는 만큼 손쉬운 상대2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때의 많은 기록들은 재산 강탈과 살인이 일상다반사였음을 증언한다. 이슬람 교도 농민들이 순례객을 납치해다 노예로 팔아먹는 일도 밥 먹듯 일어났다. 보두앵 1세가 죽고 보두앵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솔로몬 성전의 기사들
그러던 1115년, 위그 드 페이Hugues de Payens라는 기사 한 명이 성지에 도착했다. 이 괴짜 기사는 1118년부터 야파Jaffa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자원 봉사를 시작했다. 물론 혼자서는 힘든 일이었기에, 그는 북프랑스에서 온 다른 기사 일곱 명을 설득하여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다. 위그와 일곱 기사들은 대주교 앞에서 청빈, 자선, 순종의 계율을 지키며 순례자들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고 순례자들을 지키는 임무에 투신했다. 성스러운 전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개념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성스러운 전사의 개념 자체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데다가, 1차 십자군에서도 함께 싸우고 전리품을 공유하기 위해 기사들이 단체3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도 수도원을 지키기 위해 모인 기사들이 비슷한 단체를 만든 적이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기존의 기사들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수도원에 대한 소극적인 수준의 보호에 머무른 반면 위그와 그 친구들은 아예 최전방인 성지에서 적극적으로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점이었다.
1120년 1월, 이 기사들은 Nablus에서 열린 교회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모든 성직자들 앞에서, 자신들의 단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템플러들은 승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활동비와 본부 건물까지 하사받을 수 있었다. TempleMount에 서 있는 예루살렘 국왕의 궁전 일부로, 프랑크 인들에게 솔로몬의 성전(The Temple of Solomon)이라고 불리던 건물이었다. 이후 기사단은 본부의 이름을 따서 성전 기사단(The Order of the Temple)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 구성원들에게는 템플러(Templar)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템플러 역시 여기서 유래한 것이 맞다. 하지만 철자가 약간 달라서, 게임 속의 템플러들은 Templer로 표기된다.
기사 제도와 결합한 수도원 운동
예루살렘 왕국의 인정을 받긴 했지만, 템플러들은 아직 "네임드이름난 자원 봉사자들" 수준의 조직에 불과했다. 이들이 "기독교 세계구급 조직"으로 거듭나는 계기는 조금 뒤에 찾아왔다. 1126년 텔-샤콰브(Tel-Shaqab)에서 아랍군과 벌어진 전투였다. 보두앵 2세가 지휘하는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역시 많은 기사들을 잃었던 것이다. 병력을 보충하려면 새로운 십자군이 필요했다. 병력 증원을 요청하기 위해 즉시 두 명의 기사단원이 유럽으로 보내졌다. 이듬해에는 위그 역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들이 거기서 만난 사람은 시토 수도회(Cistersian)의 원장이자 유명한 수도사였던 성 베르나르(Saint Bernard of Clairvaux)였다.
(왼쪽: 성 베르나르. http://en.wikipedia.org/wiki/File:BernhardvonClairvaux_(Initiale-B).jpg)
새로운 십자군을 요청하는 위그를 만나본 베르나르는 그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위그와 그의 기사들을 시토 수도회의 군사 버전으로 봤던 것이다. 사실 템플러들과 시토 수도회의 구성원들은 의외로 닮은 점이 많았다. 시토 수도회의 choir monk들이 흰 옷을, lay brother들은 갈색 옷을 입은 것과 마찬가지로4, 템플러의 기사들은 흰 옷을 입고 그 이하의 구성원들은 갈색 옷을 입었다. 침묵을 중요시하고5 호화로움을 배격하는 생활 태도6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베르나르는 템플러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전장에서 싸우는 주의 전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베르나르는 위그에게 템플러들을 위한 규율을 제정해 주고 모병을 도와 주겠다는 약속7을 해 주었다.
이듬해인 1128년, 위그는 트루아(Troyes)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한다. 베르나르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템플러들을 위해 작성한 규정들을 보내 승인하게 했다. 템플러들에게 시토 수도회적 계율을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유럽 각지로 편지를 보내, 신을 위해 봉사하는 새로운 소명이 탄생했음을 알렸다. 전 유럽이 예루살렘 왕국을 지키는 성스러운 전사들에 열광한 것은 물론이다. 하루아침에 템플러들은 유명인사가 되었고, 전 유럽에서 기부가 쏟아져 들어왔다. 대주교가 지급하던 쥐꼬리만한 지원금이 전부였던 때와는 천차 만별이 된 것이다. 이래서 인생은 예나 지금이나 고렙의 버스를 잘 타야...
위그는 1130년 다시 예루살렘 왕국으로 돌아가 1136년에는 평화로이 생을 마감하게 되지만, 템플러들의 역사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기부 덕분에 템플러들은 막대한 땅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들이 지켜야 할 곳들도 늘어나서, 팔레스타인 성지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교도들의 접경 지역이라면 어디든지 템플러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후방에 있는 템플러 본부들은 신병의 모집과 군수 물자의 보급을 담당하는 병참 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템플러가 이후 생겨나는 기사단들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기사 단체와는 달리 이들은 수도회적인 계율을 따랐다. 수도원의 계율은 금욕적인 생활과 수도원 원장에 대한 절대 복종을 중요시한다. 템플러를 비롯한 기사단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들은 일반 수도사들과는 달리 고기를 자주 먹었다는 점8과 기도 대신 전투 훈련을 더 중시했다는 점 정도가 달랐을 뿐이다. 템플러를 첫 번째 기사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리고 템플러들의 계율은 훗날 모든 기사단 규정의 기초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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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들이 그들을 지칭했던 말을 따라 흔히 프랑크인이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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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원정의 명분이 순례자들의 안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뭔가 좀 이상하다 느낄 분들도 있겠다. 하지만 글쎄... 이라크에 진주한 미군이 당장 조직과 집회의 자유부터 금지한 걸 보면,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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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therhood, 혹은 Confraternit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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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r monk는 사제, 즉 신부 등의 성직을 맡을 수 있는 수도사를 가리키고, lay brother는 성직을 맡지 못하고 속세의 일을 하는 수도사를 가리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절에서 참선을 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살림을 맡아 하는 사판승(事判僧)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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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 수도회는 제단이 검소한 반면 템플러들은 무기에 금붙이 등을 쓰지 않았다. 당시엔 무구에 호화로운 장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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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베르나르는 20여년 뒤 제 2차 십자군을 일으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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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간단하다: 전투를 위해서는 체력을 유지해야 하니까. ↩
성 베르나르두스가 앙드레 드 몽바르(성전기사단 설립자 중 한 사람;다섯 번째 그랜드마스터)의 좌이고, 성 베르나르두스가 수도원장이 된 클레르보 대수도원이 기사단 초창기 맴버 중 한 사람인 상파뉴 백작 위그가 지은 것이라는 점 등을 토대로 (성 베르나르두스가 클레르보 대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된게 겨우 25세였다는 것도….) 성 베르나르두스와 성전기사단 사이의 유대가 1126년 이전부터 있었다는 설도…..
예, 제가 찾은 자료에서도 성 베르나르와 상파뉴 백작 등의 인맥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언급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양쪽이 서로에 대해서 건너 건너 소식을 전해듣는 정도는 일치감치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