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의 방패: 10세기 ~ 14세기 (1)
중세 유럽의 방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중세 유럽의 방패는 보조 방어구로서의 기능과 식별 표지(Insignia)로서의 기능 두 가지가 동시에 있다는 것. 두 번째는 본질적으로 보조 방어구인 만큼, 주 방어구인 갑옷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두 가지 이유에 따라 처음엔 방어구로서의 비중이 높았던 방패는 갈수록 방어구로서의 기능을 발달하는 갑옷에 빼앗겨 식별 도구로 전락하고, 결국 중세의 종말과 함께 전장에서 퇴출됩니다.
중세 초기: 노르만식 kite shield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본격적인 중세가 시작되기 전의 암흑 시대, 유럽 대륙을 장악한 게르만 야만인들이 사용하던 방패는 대개 둥글거나 타원형의 방패였습니다. 지름은 1미터를 넘는 경우가 별로 없었죠.
하지만 이 디자인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작고 가벼워서 편하게 쓸 수는 있었지만, 방어 범위가 작아서 하반신을 보호할 수 없었던1 거죠. 물론 정강이 보호대를 따로 착용하면 좋겠지만 공업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그런 물건이 흔하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에 해법을 내놓은 것은 프랑스 북부에 정착한 바이킹들의 후손, 노르만 족이었습니다. 사실 노르만 족은 중세 유럽의 전투 장비 체계를 거의 혼자 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방패 역시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정복 전쟁과 용병 활동으로 온 유럽 세계를 돌아다닌 노르만 전사들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사용되던 커다란 연(kite) 모양의 방패에 주목하고, 이것을 자신들의 장비로 도입했습니다. 이른바 노르만식 kite shield가 등장한 것이지요.
이 방패는 실물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대략 아래와 같이 생겼습니다. 나무판을 겹쳐서 몸체를 만든다 + 가운데 umbo를 장착한다 + 금속 테두리로 마무리한다는 제작 방법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모양만은 서양 연 모양으로 굉장히 길기 때문에 다리까지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위로 돌출된 부분을 사용하면 얼굴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때만 해도 가문을 나타내는 문장(紋章)이 등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각종 기하학적 모양이나 용 같은 것을 그려 넣었습니다.2
12세기 kite shield의 진화
이렇게 kite shield는 12세기까지 전 유럽에서 표준 방패로서의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죠.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컸다는 겁니다. 사실 공격 무기가 유치하던 시절에는 이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좀 불편해도 방패가 든든한 방어력을 제공해 줄 수 있거든요.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고 칼이 대형화되기 시작하자,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방패가 방어구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무 판자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방패가 아무리 발달한다 한들 기대할 수 있는 방어력은 뻔합니다. 반면 투구나 갑옷은 기술적으로 강화할 여지가 더 많고, 그 효과도 큽니다. 게다가 기병 전술이 발달하면서 기사들은 좀 더 정교하게 밀집 대형을 형성하고 돌격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되면 큰 방패는 거추장스럽기까지 합니다.
애시당초 몸 전체를 방어하려고 큰 방패를 썼던 것이니, 더 좋은 투구가 등장한 시점에서 이런 건 필요없게 되었죠. 그런 이유로, 기존보다 발달된 투구가 등장하기 시작한 12세기 중반 이후에는 방패의 모양이 변하게 됩니다. 전체적인 모습에서 곡선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이 시기 방패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시 얼굴을 보호하기 위한 상단의 돌출부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이 디자인은 기존의 것들보다 더 편리했습니다. 이제 얼굴 방어는 거의 투구가 전담하게 됐고, 방패는 몸에만 사용하면 되는 것이었죠. Great Helm이 쓰이기 시작한 13세기로 넘어오면, 안 그래도 짧아지던 방패는 더욱 더 확연히 짧아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방패는 식별 표지라기보다 여전히 방어구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12세기가 거의 끝나가면서 가문을 나타내는 문장이 슬슬 그려지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크기도 온 몸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컸거든요. 하지만 1250년대를 기점으로 방패의 성격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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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굉장히 심각하다. 흔히 냉병기 싸움에서는 팔놀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끊임없이 발로 이동하면서 공격에 유리한 포지션을 점하는 것이다(현대 검도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다리 부상으로 움직임이 봉쇄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스웨덴 비스비[Visby] 섬에서 발굴된 중세 전사자들의 유골 상당수는 대퇴골이 박살난 채로 발견되었다. 이 부분은 확실하게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는 데다 동맥 부분까지 손상시킬 수 있어서 중세 검술에서 중요한 공격 부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