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갔다.

음악회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

『건축학 개론(2012)』 음대생 서연의 첫 등장.

"그러니까 소개팅에서 애프터까지 간 적도 없는 내가 무슨 연애를..."

"안 봐도 뻔하네. 너 또 전화로 안 하고 문자나 보냈지?"

"아니, 상대방도 바쁠 텐데 무슨 전화를 해요 전화를. 난 한창 바쁠 때 전화오면 짜증만 나더구만."

"어휴, 하여간 고어군 바보야 바보. 내가 남자여서 고어군 같았으면 여자들 막 꼬시고 다녔겠다."

두 달쯤 전의 일이다. 어느 일요일 저녁, 나는 지인인 K형과 P양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중반부터 대화의 주제는 연애로 흘렀다. 식사를 마치고 장소는 근처 커피샵으로 옮겨졌지만, 주제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런데 상대는 3년차 커플이고 나는 연애 경험이 없으니, 대화는 갈수록 과외 비슷한 분위기가 되어 갔다.1 나도 과외를 해봐서 알지만, 배우는 사람이 좀 이해도 하고 알아 들어야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도 신이 난다. 문제는 수업을 듣고 있는 내가 (최소한 이 방면에서는) 구제 불능의 낙제생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이 용케도 뒷목을 잡지 않았구나 싶다. 그래도 언제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굽신굽신

수업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아주 인상깊게 남았다. K형과 P양, 둘이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물론이고 박자, 성조, 심지어 쉬는 타이밍까지. 마치 서로 다르지만 완벽히 화음을 이루는 두 선율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게 커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우절날 나 여자친구 생겼다는 드립으로 스무 명을 낚았지

2.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S.Bach)는 평생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그를 대표하는 장르는 역시 푸가(Fuge)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음악 이론은 하나도 모르니, 그냥 아는 범위 안에서만 이야기하겠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동네 한 바퀴" 를 떠올려 보자. 다섯 파트가 시간차를 두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도 서로 잘 어울린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선율이 서로 조화롭게 배치하는 작곡 기술을 대위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네 한 바퀴" 같은 돌림노래는 이 대위법을 지키는 음악 형식의 하나2다.

푸가 역시 대위법을 지키는 음악 형식이다. 다만 훨씬 복잡하고 또 가장 고난이도다. 푸가는 하나의 성부가 연주한 주제를 또다른 성부가 흉내내고 뒤쫓아 가는 식으로 연주된다. 하지만 단순히 A 성부가 연주한 걸 뒤따라가는 B 성부가 copy & paste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앞서 나가는 A가 이어 연주하는 선율과 뒤따라가는 B가 모방하고 있는 선율이 서로 잘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복잡 정교하게 배치된 여러 성부가 빚어 내는 완벽한 화음, 이것이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푸가의 매력이다.

[youtube=http://www.youtube.com/watch?v=xY_GMnQvj6E]

바흐는 푸가의 달인이었다. 일생 동안 수백여 곡을 작곡했을 정도3였다. 『푸가의 기법』 같은 푸가 곡집은 물론이고, 규모가 큰 협주곡에서부터 커피 칸타타처럼 작은 곡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품들 아래에는 푸가가 밑그림처럼 깔려 있다.4 덕분에 이따금 바흐의 곡들을 듣다 보면, 정교하게 구성된 건축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3.

영화 『건축학 개론』을 봤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 대해 첫사랑의 신화에 대한 영화,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라고들 말한다. 그래서인지 부부나 연인끼리 함께 보러 가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혼자 가서 추억에 젖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이 영화에 대해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반면 여러 번 가서 봤다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걸 보면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릴 만큼 감성적인 영화이긴 한 것 같다.

소개팅에서 애프터까지 가본 경험도 없는 탓에, 나는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저 영화의 정말 예쁜 화면이라기보다 한가인하고 배수지과 깨알같은 상황과 대사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겠구나 하고 느꼈을 뿐이다. 조금 이상하지만, 내가 굳이 느낀 게 있다면, 이 영화가 참 푸가를 많이 닮았다는 것이었다. 15년 전, 대학 신입생인 승민과 서연은 건축학 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둘은 차츰 마음을 열고 친해지지만, 사소한 오해로 인해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15년 후, 건축가가 된 승민에게 서연이 찾아와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고 한다. 집이 지어지는 동안, 카메라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오래 전 머리속 저켠으로 밀어 놓았던 기억의 꾸러미를 펼쳐놓는다.

연기하는 배우들이 다른 만큼, 과거의 둘과 현재의 둘은 15년의 세월만큼이나 다른 존재다. 하지만 두 이야기가 완전히 별개로 놀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앞서 나간 성부의 연주를 뒤따라 가는 성부가 모방하고 변형하듯이, 과거의 둘과 현재의 둘의 이야기는 완전히 같기도 하고, 서로 닮아 있기도 하고, 정 반대로 뒤집어져 있기도 하다. 카메라는 이 두 이야기를 오가면서 이젠 작은 조각으로만 남아버린 오랜 추억의 조각들을 쫓아간다. 서로 다른 선율을 연주하지만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그 모습이 여지 없이 화면에 그려진 푸가였다.

4.

어떻게 보면, 연애라는 행위 자체가 푸가와 그리 다르지 않은 행위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만나게 됐건, 당사자들은 이미 수십 년을 완전히 따로따로 살아 온 독립적 개체다. 지나온 세월과 환경이 다른 만큼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따로 따로 연주되던 그들의 삶은 변화를 겪는다. 한 사람의 연주를 다른 사람이 쫓아가기도 하고, 변주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함께 연주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다.

서로 다른 연주를 하지만 서로 묘하게 닮아 있고, 전혀 소리를 내지만 서로 잘 어울리는 것. 아마도 사람들이 평생 첫사랑을 추억하는 이유는, 두 선율이 어울려 처음으로 화음을 이루던 순간의 그 강렬한 환희를 잊을 수 없어서가 아닐까. 내가 처음으로 푸가에 빠져들었던 그 순간을 기억하듯이.

5.

영화가 끝났다.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오면서 상영관에 불이 켜지던 순간, 객석으로 눈을 돌렸다. 스탭 롤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갈 길을 재촉하던 여느 영화들과는 달리, 관객들은 흡사 자리에 달라붙은 것처럼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 그건 영화가 아니라, 향수였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오랫동안 마음 속 한켠에 밀어 두었던 옛 기억과 아련한 향수에 압도되어 영화가 제공하는 환상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것이 추억인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밤, 집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을 푸가의 곡조가 따라왔다.

[youtube=http://www.youtube.com/watch?v=JTQsxs0mzc0]

* 사족: 대위법을 지키는 또다른 장르로는 카논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돌림노래가 카논의 일부로 분류된다.) 조지 윈스턴의 연주로 유명한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Canon and gigue)』가 이 장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로맨틱한 분위기 덕분에 영화나 CF 등에 굉장히 자주 삽입된다. 이 곡은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서도 나왔고, 역시 첫사랑의 추억을 그린 영화인 『클래식』에도 나오고, 이 영화에서도 장래 아나운서가 꿈인 서연이 학교 방송반에서 처음으로 DJ 노릇을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 사족 둘: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알아차렸겠지만, 서연이 첫 등장 때 품에 안고 있는 악보집이 바흐의 악보집이다. 아마도 평균률 클라비어 곡집이 아닐까 하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곡집은 전체가 다 푸가다(...).

참고문헌

폴 뒤 부셰 저, 권재우 역, 『바흐: 천상의 선율』, 시공사, 1997


  1. 근데 내가 P양보다 두 살 더 많다(...). 

  2. 덧붙이자면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돌림노래는 13세기의 영국 민요라고. 

  3. 심지어 푸가를 자동으로 작곡하는 기계를 가지고 있다는 혐의로 고발을 당했을 정도. 그런데 푸가의 작곡 자체가 대량의 수학적인 계산을 요구하는 탓에 이건 요즘 컴퓨터로나 가능하다. 그나마 그 수준이 바흐의 작품과 비교하는 게 민망할 지경. 

  4. 그래 봤자 나 같은 경우는 음악 이론을 몰라서, "어 이거 뭔가 비슷한 분위기인데" 정도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