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

"한 사회의 법과 정책은 그 역사와 문화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1.

상투와 총

윈체스터 1873년형. (출처: flickr)

"미국 가면 몸조심 잘해라. 미국은 그렇게 총이 많다며?"

아직 한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출국 준비를 하면서 아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나오는 걱정은 한결같았습니다. "총 조심해라. 밤 늦게는 나가지 말고." 아무래도 제가 가는 곳이 총으로 유명한 텍사스라서 더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다음날 아침 도시 구경을 하러 호텔을 나섰더니, 오래지 않아 작은 총포상이 보였습니다. 살림살이를 마련하기 위해 간간이 들르곤 했던 대형 마트 한구석에서도 총기 손질용 도구와 총알을 팔고 있었습니다. Tv를 켜면 간간이 총기 사고에 대한 뉴스를 들을 수도 있었구요.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하루 평균 87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하지만, 하루 자살자가 대략 104명이라고 하니까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나마 그 중 대략 1/3은 사고나 오발이라고 하더군요. "총은 군대나 경찰 무기고에 있는 게 당연한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제게, 이런 광경은 사뭇 낯선 광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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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체스터 총. 서부 개척 시대를 상징하는 총이다. (출처: flickr@salsaboy)

총만큼이나 제 눈에 신기하게 보인 것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어디에나 나부끼고 있는 성조기였습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은행이나 대형 상점, 심지어 아파트 관리 사무소처럼 사람이 조금이라도 모일 만한 곳이면 어김없이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었습니다.1 사실 성조기만 걸어 놓은 것도 아닙니다. 텍사스 주기[州旗]도 함께 걸어 놓았더군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텍사스 주기가 더 많습니다. 성조기를 안 걸어 놓은 데는 있어도 텍사스 주기를 안 걸어 놓은 곳은 없었으니까요. 주기는 둘째치고 텍사스를 상징하는 Lone Star 문양이 없는 데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점심 때 먹은 맥주와 지금 덮고 자고 있는 이불에도 이 패턴이 박혀 있으니 할 말 다 했다고 할 수 있죠.

여기서 오래 사신 교민 분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더군요. "여기 사람들은 정말이지 자부심이 대단해요. 애국심도 강하고 우리야말로 진정한 미국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죠."2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텍사스 주의 역사 자체가 미국 역사의 축소판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이민을 왔고, 압제자를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했으며, 그 뒤로도 열심히 노력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주 중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손만으로 이루었습니다.34 이 정도면, 자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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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개척 시대를 주름잡은 총들. 맨 오른쪽이 윈체스터 1866년형이다. 미국 원주민 박물관 소장. (출처: flickr)

어느 주말 장을 보고 돌아오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기 소유를 당연시하는 것과 성조기(텍사스 주기)를 자랑스러워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과연 다른 현상일까? 같은 현상이 가진 두 모습 아닐까?"5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죠. 텍사스 사람들이 자기들을 진정한 미국인이라 여기며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그들의 역사가 미국 역사의 축소판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을 찾아 이역만리로 이민을 와서 삶의 터전을 꾸리고,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자들을 쫓아내서 독립을 하고, 개척에 성공하여 부유한 삶을 누리게 된 것 말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입니다. 갑자기 이역만리에 뚝 떨어진 사람이 가족과 재산을 지킬 방법은 총 뿐입니다. 영국군이나 멕시코군을 몰아 내는 데도, 원주민과 싸워 땅을 뺏을 때도, 농장에 쳐들어 온 산적이나 소도둑을 막을 때도 언제나 총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총이라는 게 단순한 무기를 넘어서 일종의 문화적 상징, 자유의 상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역사를 상징하는 텍사스 주기나 성조기를 자랑스러워하고 언제나 게양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만큼 총을 소지할 권리를 당연시하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글쎄요,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십자가를 신성시하지 않습니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시간이 길까요 아니면 미국인(텍사스 인)들이 총을 들고 다닌 시간이 길까요? 흔히 간과하는 것이지만, 미국은 민병대의 무장반란으로 시작된 국가입니다. 헌법에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권리, 이를 위해 무장할 권리가 당당하게 규정되어 있는 국가란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앙 집권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무기를 사사로이 매매하고 소지하는 사람은 사실상 범죄자 뿐6이지만, 미국인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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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총 광고. 유명 총기 회사인 윈체스터 사의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 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 소장. (출처: flickr@nerdcoregirl)

옛날에 본 다큐멘터리 중에 전미 총기 협회(NRA) 회장7이 총기 소지의 자유를 옹호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역사는 피로 쓴 역사야. 우린 아주 폭력적인 삶을 살아 왔지."8 그 때 작은 영화관에서 그 장면을 보면서 살짝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니, 총기 소지의 권리를 옹호하랬더니 왜 갑자기 뚱딴지처럼 역사 타령이래? 지금이 서부 개척 시대야?"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그 사람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가 이런 힘든 환경 아래에서도 자랑스러운 역사를 써온 것은 다 총이 있었기 때문이야. 총은 우리에게 있어 자유의 상징이라고. 이런 멋진 전통을 왜 포기해야 하지?" 이 장면이 떠오른 순간,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다른 것들이 하나 둘 연결되었습니다. 왜 뉴스에 나온 전미 총기 협회 회원들이 "자유"라는 단어가 포함된 구호를 대문짝만하게 붙여 놓았는지, 너도나도 자랑스럽다는 듯이 성조기를 들고 나와 있는지... 그들에게 "자유" "총" "자부심"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4.

"날 죽이고 총을 뺏어가!(From my cold dead hands!)" 전미총기협회 총회에서 연설중인 찰턴 헤스턴.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컬럼바인(2002)』의 한 장면.

"왜 미국인들은 총을 금지하지 않을까?" 이 사안에 대해 조금 들은 바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전미 총기 협회(NRA)가 그렇게 막강한 로비 조직이라며?" 물론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만, 이 대답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이 대답은 총이 그저 무기일 뿐이고, 마땅히 공권력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생각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총에 대해 한국인과 같은 생각을 할 필요도, 할 이유도 없는데 말입니다9. 오히려, 총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애지중지되며 당연시되어 온 사물을 함부로 금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유가 있든 없든 간에 당사자들이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를 발로 밟으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칼을 차는 것을 금지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 좀 더 확실하게, 조선시대 사람더러 상투를 자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그렇게 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단발령 시행에 반대하여 일어난 을미의병(1895).

이렇게 놓고 보면, 미국 사회의 총기 문제는 단순히 외국에 대한 이야깃거리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류의 사물은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랫동안 그 중요함이 별로 의심받지 않던 사물이 문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거기에 애착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그들을 처치 대상, 꼴통, 이익단체의 로비에 휩쓸려다니는 바보들로 조롱한다고 해서 그들의 생각을 돌려 놓을 수 있을까요?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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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에 전시된 윈체스터 총기들. (출처: flickr@bryanh)

며칠 전, 코네티컷 주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에서 총기 난사 사고는 일 년에 몇 번은 터지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사고가 터진 곳이 초등학교인 데다가 희생자의 대부분이 열 살도 안 되는 어린이들이어서 그 충격이 더 큽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방탄 가방이 불티나게 팔리뉴욕 시장이 강력한 총기 규제를 천명한 가운데, 전미 총기 협회 부회장은 "모든 학교에 무장 경비원이 배치되었다면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총기 난사는 게임이나 미디어 탓"이라는 발언을 하여 빈축을 사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미국에 온 지 이제 석 달 정도밖에 안 됐고 아직도 영어에도 서투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먼 나라의 일로 치부하고 흘려듣지만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사회의 총기 문제는,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1.

사진에 나오는 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란 윈체스터 총기 회사의 창업주 헨리 윈체스터의 외동딸 사라 윈체스터의 저택이다.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인 그녀는 남편과 딸을 잃으며 지극히 불행한 삶을 살았는데, 자신의 불행이 윈체스터 총에 살해당한 미국 원주민들의 원한 때문이라는 영매의 말을 듣고 이후 32년간(1884~1922) 계속해서 집을 뜯어고치는 기행을 벌였다고 한다. 문 없이 벽으로만 둘러싸인 방이라던가, 13을 테마로 한 정원 등등... 지금은 관광지 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1. 그냥 덜렁 걸어 놓은 것도 아니고, 리비아에서 미국 대사가 살해당하거나 총기 난사 사고 등이 난 날이면 어김없이 조기로 게양된다. 계속 신경을 쓰고 있다는 얘기. 

  2. 다른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신 분들 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봐서 대체로 맞는 이야기인 것 같다. 쉽게 말해 육군 전역자들이 해병대 전역자들 보듯 한다고... 

  3. 다만,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텍사스가 완전히 자기 힘만으로 멕시코에서 독립을 한 것은 아니다. 미 연방군이 직접적인 도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방조를 해 주었다. 하지만 미 연방군도 원래 프랑스의 엄청난 지원을 받아 겨우겨우 영국군을 몰아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기 혼자서 해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4. 미국 다른 주들의 대부분은 처음부터 영국의 식민지로 시작했거나, 연방정부의 지원 아래 개척을 진행된 뒤 주로 승격된 반면 텍사스는 스스로 연방에 가입 신청을 해서 미국의 일부가 됐다. 

  5. 좀 더 첨언하자면,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당장 미국 안에 깔린 총이 3억 정이 넘는데, 하루아침에 총기의 소지 및 매매를 금지시키면 평범한 시민들은 자기 목숨을 지킬 방법이 없어진다. 또 하나, 미국 시골은 우리네 시골하고 차원이 달라서 하루 종일 달려도 집 몇 채 겨우 있는 경우가 흔하다. 공권력이 처음부터 치안을 보장할 수 없는 것. 결국 이런 경우엔 시민들 스스로가 무장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6. 실제로 조선 시대 도검 유물 중 "이걸로 돈을 많이 벌 수 있기를!" 이라고 새겨진 것이 전해진다 - 이쯤 가면 산적 인증이다! 게다가 어느 건달이 부산의 왜관에 가서 일본도를 사려고 하다 적발된 적도 있었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에 전하는데, 읽어 보면 분위기가 "뭐 이런 위험 천만한 놈이 다 있나" 수준이다. 

  7. 유명 배우 찰턴 헤스턴 옹

  8. 이 부분은 여기서 볼 수 있다(자막 없음). 보면 알겠지만, 미국의 시민권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둥, 캐나다나 독일과는 달리 여러 종족(ethnic group)이 섞여 있어서 그렇다는 둥 인종차별적 생각을 언뜻 비춘다. 캐나다는 사냥꾼의 나라고, 따라서 인구 대비 총기 수로는 미국 못지 않다. 

  9. 하기야 "미국인" 이라는 말 자체가 어찌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생각일수도 있다. 텍사스만 해도 한반도보다 훨씬 넓다. 그만큼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억지로 묶어서 취급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