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의사 결정' 이 뭐냐고?

일전에 썼던 글이 화제가 되었는지 여기저기서 반론이 나오고 있는데, 원문 아래에도 인문쟁이(tm)들의 댓글이 주르륵 붙었다. 근데 무슨 인문학적 통찰력(?)의 결과물인지 반론의 내용이 죄다 비슷비슷하다: "개발자가 CEO를 한다고 해서 잘 된다는 보장은 없는데?", "왜 무조건 개발자 말만 옳다고 하냐" 대충 이런 얘긴데 응, 물론 그런 의미 아니고 니들이 잘못 알아들은 거다.

문제는 스타트업들의 의사결정 구조가 멍청하다는 거고, 그런 멍청한 짓거리에 개발자들이 장단 맞춰 줄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다는 거다.

1.

(스티브 잡스를 추종하는 수많은 스타트업 인문주의자(tm)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기술적 의사결정의 필요성이다. 흔히 아이디어가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그 '아이디어'는 최소한 2개 이상의 서로 다른 개념을 가리킨다:

  • A. 최종 결과물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발상. 카카오톡을 예로 들자면, "기존의 1:1, 1:n 휴대폰 문자와는 달리 참여자들이 n:n으로 대화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을 만들자" 가 여기에 해당한다.
  • B. A를 구현하기 위한 기술적 판단. "사용자가 보낸 메시지를 어떠한 저장소를 사용해서 어떻게 저장하고, 어떻게 중개하자." 가 여기에 해당하다.

많은 사람들이 B의 존재를 모르거나 그리 어렵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A만 있으면 B는 그리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디어' 라는 말을 A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현실은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서, 게시판 서비스처럼 게시물의 수정이나 삭제가 가능한 경우와 인스턴트 메신저처럼 낙장불입인 경우는 사용 가능한 저장 방식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떤 데이터베이스를 어떻게 조합해서 사용하는지부터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전달 로직도 마찬가지, 게시판은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왔을 때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만, 메신저의 경우 채팅방에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야 할 뿐더러 적절한 대상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까지 해야 한다. 그런데 메시지 전달 로직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필요한 서버의 수와 가능한 배달 시간이 변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 가면서 개발을 해야 한다. 이렇게 A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B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과정을 기술적 의사결정이라고 한다. 만약 여기서 메시지 저장 기간을 어느 정도 못 늘린다, 배달 시간을 일정 수준 이하로 줄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면... 최종 결과물의 모습 또한 변한다. 이렇게 A와 B는 일방적이고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B가 쉽고 단순하지도 않고, A가 가치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혹시 인포뱅크의 엠앤톡이라는 서비스 기억하는지? 엠앤톡은 카카오톡과 A 측면에서는 완전히 동일했고 심지어 먼저 출시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까지 했지만1, 결국 카카오톡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B에서 카카오톡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카오톡은 사용자가 아무리 많이 붙어도 멀쩡했지만 엠앤톡은 그러질 못했는데 - 툭하면 느려지는 메신저 서비스를 누가 쓴단 말인가? 사실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탓에 선발 주자가 후발 주자에게 격침당한 건 엠앤톡만의 사례도 아니다. 혹시 SNS 서비스 초기에 유명했던 마이스페이스 기억하는지? 마이스페이스는 선발 주자로서 뮤지션 - 팬이라는 핵심 고객층까지 보유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페이스북에 밀려서 그런 게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이유? 똑같다 - 마이스페이스는 늘어나는 사용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느려졌던 반면 페이스북은 멀쩡했거든. 아무도 심하게 버벅거리는 웹 서비스 같은 거 쓰고 싶지 않아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아이디어(A)가 좋아서 성공했다는 건 그냥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공적인 서비스는 뛰어난 발상만큼이나 탄탄한 기술적 판단의 결과물이다.

페이스북이 아이디어(A)가 좋아서 성공했다고 진단하는 이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페이스북은 시스템이 아주 탄탄합니다. 기술적인 부분(B)에서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이죠. 이런 것 없이 여러 사람들이 뛰어드니 나도 뛰어든다고 하면 성공할 확율은 상당히 낮습니다.

- 김장중, 이스트소프트 대표 (출처: 블로터)

저는 그래서 사원 아이디어(A) 게시판에 별로 관심없습니다. 이미 아이디어(A)는 너무 넘쳐나기 때문이죠. 모바일에 대한 새로운 서비스 모집해봤는데 특이한 거 없었습니다. 물어보면 다 같은 것 나옵니다. 사용자 니즈? 다 알고 있습니다."

- 이해진, nhn 총수 (출처: 임원기의 인터넷 인사이드)

2.

물론 뭔가 기업을 운영하려면 기술적 의사 결정만 필요한 게 아니다. 재무적인 의사결정도 해야 하고 법무적인 의사결정도 해야 한다. 요즘 기업의 의사 결정이 워낙에 전문화되고 복잡해진 탓에 한 사람이 모든 분야를 다 잘 아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종 결정권을 가진 CEO가 있는 것이고 그 주위에서 의사 결정을 돕는 CTO, CFO, CLO 같은 분야별 전문가가 있는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60년대에 이러한 직책들이 등장했다고 하니 거의 반세기에 걸친 역사를 가진 셈이다. CEO는 이렇게 각 분야의 전문적 판단 사이를 조율해서 최종 의사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3.

그런데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적 통찰력'을 모범 삼는 스타트업 기업가(tm)들 하는 걸 보면 기술적 의사결정의 필요성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장 저 글에 달린 댓글 중 하나가 그 증거다.

현재는 아이디어와 서비스가 각광받는 시대이고 기술은 많이 일반에게 보급되었습니다. 카카오가 만들기 어려운 채팅 플랫폼입니까?

시작부터가 이 모양이니 병특 마치고 학교 돌아온 복학생의 눈에도 허접해 보이는 닭짓들이 난무한다:

  • 기술적 의사 결정을 자기가 하려고 한다. 학부 1학년 수준의 이해력도 없다보니 당면한 문제를 이해하지도,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도 못할 뿐더러 어디서 어설프게 주워들어 온 걸 가지고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잦다. 당연히 망한다.
  • 해당 분야에서 일해 온 (하지만 실력은 별로 없는) 자기 지인을 데려다가 기술적 의사 결정을 하라고 앉힌다. 두말할 것 없이 이 인간 수준도 그 밥에 그 나물이다. 당연히 망한다(2).
  • 기술적 지식을 가진 사람을 최대한 의사결정에서 배제하거나, 기술적 전문성에 의거한 판단을 "기술적 완벽성을 추구하지 마라", "기술에만 몰입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못 본다" 는 식으로 몰아붙이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좋은 거라고 착각한다. 시발... 당연히 망한다(3).

사정이 이 모양이니 개판이 날 수밖에 없다. 사실이냐고? 개발자 구한다는 스타트업 기업가(tm)들 하는 소리를 잘 살펴보시길: "아이디어(A)는 전부 준비되어 있으니 오셔서 개발만 해주시면 되요!" 라고 자랑스럽게 지껄이는 놈들이 널렸다. 기술적 의사 결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반면 쓸데없는 자리를 만드는 데는 혈안이 되어 있다. 제품도 매출도 없는 기업에 CFO니 CSO니 하는 폼 나는 직함을 나눠가지고 거시적인 전략을 논의한다는 핑계 아래 음풍농월이나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타트업 지원금이니 하는 눈 먼 돈이 넘쳐나다 보니까 이런 것들도 사장 직함을 다는 게 가능한 게 현실인데, 정말이지 사업 놀이라는 표현 이상을 찾을 수가 없다.

출처: 미생 제 42수.

4.

솔직히 나도 개발자 출신이 CEO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발자 경력을 가진 사람이 경영진에 있고 장식품 이상의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중요하다. 기업의 의사 결정 수준뿐만 아니라 회사가 개발자를 어떻게 대할 것이냐에 대한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권자들이 기술적 의사 결정을 맡는 직책(CTO라든가)을 허접하게 대한다면, 그 밑에 있는 다른 개발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나? 아무도 자기 자신의 인생을 그런 허접한 사업놀이에 걸고 싶어하지 않아한다.

개발자들이 스타트업보다 넥X같은 대기업 게임회사를 더 선호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국 게임회사가 아무리 후졌다고 한들 최소한 기술적 의사 결정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은 하고 있고, 거기에 맞춘 의사 결정 구조도 이미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윤이 남고 있고, '상장 기업'인 거겠지? 왜 그렇게 됐냐고? 의사 결정권자들이 낙하산 메고 뛰어내려 봤으니까. 살아남아서 작전을 성공시켜 봤으니까.

5.

"송재경이 뛰어난 개발자였는지는 몰라도 뛰어난 게임 제작자는 아니라는 건 확실" 하다고? 아무리 그래도 요새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양산형 스타트업들만 하겠냐?


  1. 카카오톡은 2010년 3월 iOS버전이, 8월에 안드로이드 버전이 처음 출시되었지만 엠앤톡은 이미 2010년 2월에 두 번째 버전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