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7일 오후 8시

영국 런던

1.

포츠머스에서 눈은 배부르게 구경 잘 했지만, 애석하게도 배는 사정이 그렇지가 못했다. 기차를 타고 워털루 역으로 돌아오면서 우리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일단 뭐 좀 먹고 생각하자 뿐이었다. 뱃속에서는 슬슬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젯밤 영국으로 오면서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쓴 데다가, 오늘 쓴 런던 ↔ 포츠머스 왕복 기차표값도 만만치 않았다. 포츠머스에서 쥐꼬리만한 점심을 먹었지만, 이걸로 성인 남자 두 명의 배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본 정도를 예상하고 예산을 짠 내가 어리석었다. 여기는 일본보다 훨씬 비싸다. 이미 하루 예산이라는 개념은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린 상황.

밥은 먹어야겠는데 돈은 없고. 배는 고프고.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서 민박집 밖으로 기어나와 이곳저곳 기웃거리는데, 민박집과 워털루 역 사이에 웬 패스트푸드 점이 하나 보였다. 가격도 싸 보였다.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들어갔다.

https://live.staticflickr.com/3294/3091748900_c6d61371fc_b.jpg

"Perfect Fried Chicken" - 저 비범한 작명이라니... (원본: flickr@gorekun)

2.

이 패스트푸드 점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가 힘든 곳이었다. 우리나라 패스트푸드 점에서는 돼지고기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데, 여기 것들은 전부 치킨버거 아니면 양고기 케밥, 후렌치 프라이 정도였다. 그렇다. 여기는 영국에 사는 무슬림들이 드나드는 패스트푸드점이었다. 서남아시아 사람인 듯한 점원이 웃으면서 "무엇을 드릴까요?" 하고 물어 보니까 기분이 묘했다.

https://live.staticflickr.com/3288/3090904691_b9600c5403_b.jpg

카운터. 코란 말씀을 적은 서예 액자가 걸려 있다. 나중에야 알아챘지만, 맹인 안내견 외의 개는 들어올 수 없다 - 이슬람에서는 개를 부정한 동물로 보아 마약 수색견도 안 쓰려고 한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원본: flickr@gorekun)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점은 이제 대세라는 명사로 설명하기에도 모자란 현상이다. 재미있는 건 이 현상이 가진 양면성. 패스트푸드 현상은 자신의 방식 - 수백 쪽짜리 운영 매뉴얼이라던가 - 을 전세계에 전파하기도 하지만, 현지의 문화에 맞춰 변화하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선보인 불고기버거, 라이스버거나 인도에 있다는 야채버거 등등이 그 좋은 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자리에 앉아 작은 매장을 둘러보았다. 코란 구절을 걸어 놓고 양고기와 케밥을 파는 이 기묘한 이름의 패스트푸드점 또한 그러한 적응의 결과물 중 하나로 보였다. 세계화라는 현상의 일면을 차곡차곡 접어 좁은 장소에 전시해 놓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재미있는 곳이다.

3.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구석도 있어 보였다. 우리는 그날, 배가 너무 고파 치킨에 후렌치 후라이/양고기, 음료수 두 개를 곁들여서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한 사람 앞에 2 파운드 반밖에 안 들었다.

https://live.staticflickr.com/3002/3091746684_a21bdc2cff_b.jpg

양고기(오른쪽)는 삼겹살 비슷한 맛이었다. (원본: flickr@gorekun)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주머니 가벼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 이런 음식밖에 없다. 물가 비싼 영국에서 겨우 2파운드에 저 정도 요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여기 몇 번 더 들러서 식사를 해결했다. 돈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 때마다 어떤 사람들이 여기 오나 싶어서 유심히 살펴봤다. 결론은 뻔했다. 우리처럼 주머니 가벼운 서남아시아 사람들이었다. 밥 먹을 시간이 없는 택시기사가 후닥딱 요기를 하고 나간 적도 있었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기야 했지만, 패스트푸드점 움식은 대략 정크 푸드Junk Food라는 별명을 가진 음식들이다. 결코 주식을 삼을 만한 음식은 아닌 것이다. 우리야 여행중에 잠깐 이런 음식을 먹고 버틴다고 치지만, 주머니 가벼운 죄로 거의 매일 먹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역사책을 펴면 먹을 것이 모자라 굶는 노예들과 충분히 잘 먹는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세월이 흐르고 과학기술은 발달해서 배 곯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어졌지만, 상황이 크게 호전된 것 같지는 않다.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버린 가난한 이민자들은 바쁘게 일하기 위해 정크 푸드를 먹고, 돈이 충분한 사람들은 시간 여유를 갖고 조리한 음식을 먹는다. 양자가 가진 거리는 명백하다. 없는 자는 굶고 가진 자는 잘 먹는 게 유사 이래의 이치라지만, 그게 별로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씁쓸했다.

4.

패스트푸드 속의 세계화

원본: flickr@gorekun

작은 패스트푸드점이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이 재미에 여행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1. 그런데, 사진 보다 보니까 또 먹고 싶네. 이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