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10일 오후 4시

스코틀랜드 - 에딘버러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서양 장기말은 아래 사진과 같이 표준화된 것들이다. 이것은 19세기 영국의 체스 기사 하워드 스턴튼이 고안한 것인데,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스턴튼식(式) 체스 세트" 라고 부른다.

스턴튼식 체스 세트. http://en.wikipedia.org/wiki/File:JaquesCookStaunton.jpg

스턴튼이 이러한 형식의 체스 세트를 고안하기 전까지, 체스 말들은 제각각의 개성을 뽐내는 것이 당연했다. 장기 자체가 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인 만큼 말들이 정교한 미니어처를 방불케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된 체스 세트는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비싼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그 오래된 체스 세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대영박물관스코틀랜드 박물관이 공동 전시하는 "루이스 섬 체스 세트Lewis Chess Set" 다. 발견지의 명칭을 따서 이름이 붙은 이 세트는 현존하는 몇 안되는 중세 시대의 체스 세트이기도 하다. 1831년경 스코틀랜드 서쪽의 루이스 섬Isle of Lewis의 해안가 모래언덕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두 93개의 말이 전한다. 이들 중 82개는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11개는 스코틀랜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대영박물관 한국 특별전에서 판매된 복제품 - 없어서 못 팔았다고 한다.

역사적 배경

장기판 위의 중세 병정들, 루이스 섬 체스 세트

루이스 섬 체스 세트. 스코틀랜드 박물관 소장.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9세기 말,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거대한 변혁을 맞게 된다.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수확이 늘었고, 영양 상태도 좋아졌다. 이에 따라 인구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결국 배를 타고 주변 영토를 약탈하거나 정복·정착하기 시작한다. 바이킹 전설의 시작이다.

특히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은 인구가 희박했던 스코틀랜드 북부와 근처의 섬들, 멀리 그린란드 등의 섬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했다. 이들이 차지한 영토 중에는 스코틀랜드 북서쪽에 위치한 헤브리디스 제도도 있었는데, 이 체스 세트가 발견된 루이스 섬 또한 여기에 속한다. 이 섬들은 1266년 스코틀랜드에 넘어가기까지 노르웨이 왕국의 영토였다.

루이스 섬 체스 세트는 바로 이 시기(12세기경), 노르웨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노르웨이의 3대 도시 중 하나인 트론헤임Trondheim에서 이것과 비슷한 체스 세트가 발견된 바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장기말들의 소재인 바다코끼리의 엄니1는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이 매매한 상품으로 유명하다. 신비한 효험이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이 정착했던 그린란드의 주 수출 상품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유럽에서 장기라는 놀이의 확산과 노르웨이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문화가 영국 문화에 미친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모습

대영박물관 소장품을 가까이에서 본 모습. http://en.wikipedia.org/wiki/File:UigChessmen_SelectionOfPieces.jpg

이 세트는 하나의 세트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말의 수가 많다. 비숍(Bihop, 象)과 나이트(Knight, 馬), 룩(Rook, 車) 등이 열 개가 넘는데, 그래서 약 4개 정도의 세트에서 나온 말들로 추정되고 있다. 사용 흔적 자체가 없으므로2 장기판을 팔러 가던 상인이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단순한 탑 모양으로 묘사된 폰(Pawn, 卒/兵)에 반해 그 외의 장군 말들은 당대의 무구를 상당히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투구. 대부분의 말들이 쓰고 있는 고깔 모양의 투구는 일명 Norman Conical Helmet으로 불리는 것으로, 원뿔형의 몸체에 코를 보호하는 나잘 바Nasal Bar가 장착된 모습이다. 이 투구는 10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사용되었는데, 이름 그대로 바이킹의 후손들인 노르만 족이 사용하던 것들이다. 바이킹3들이 중세 유럽의 무기와 갑옷에 미친 영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연 모양의 방패Kite Shield와 커다란 병두가 붙어 있는 검 역시 마찬가지로 당대에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당대의 무구를 재현한 모습. http://www.flickr.com/photos/e_phots/2691812399/

꽤나 정확한 무구를 지참한 말들이지만, 한결같이 꽤나 코믹한 표정을 보여 준다는 점도 익살스럽다. 대영박물관에서 가장 인기있는 전시물이라고 하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드는 유물이다.

룩(Rook, 車)은 웬지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다. http://en.wikipedia.org/wiki/File:Chess01.jpg

참고문헌

Yves Cohat, The Vikings: Lord of the Seas, Harry N. Abrams, 1992

(김양미 역, <바이킹: 바다의 정복자들>, 시공사, 1997)

N. Stratford, The Lewis Chessmen: The Enigma of the Hoard, The British Museum Press, 1997

J. Robinson, The Lewis Chessmen, British Museum Press, 2004


  1. 고래 뼈로 만든 것도 몇 개 있다. 

  2. 발견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붉은 녹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체스 말이 흑-백이 정석이지만, 당시에는 홍-백이 정석이었다. 아마도 세월이 흐르면서 색이 벗겨진 것 같다. 

  3.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지방에 정착한 바이킹들을 노르만 족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