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기사와 갑옷담당종자
- 이 포스트에 사용된 사진들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갑옷 전시실(Emma and Georgina Bloomberg Arms and Armor Court)에 소장된 것들입니다.
우리는 중세라고 생각하면 반짝이는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전사들을 떠올립니다만 이런 멋진 모습을 위해서는 갑옷 손질이라는, 지저분하고 힘든 "삽질" 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개삽질이 고귀한 기사가 할 일은 아니니 당연히 누군가에게 떠맡겨졌는데, 역사는 이들을 "갑옷담당종자(Arming Squire)" 라 부릅니다. 요즘 F1 레이싱을 보면 한 명의 레이서가 탄 차에 열 명이 넘는 정비원들이 달려들어 자동차를 정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기사들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중세 기사의 정비원"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이 갑옷담당종자였습니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중세의 전쟁은 몇 분 정도만에 끝나는 간단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전쟁은 요즘처럼 대포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천 명이 동원되는 대규모 전투라도 한 번 벌어지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몇 시간이 넘게 온 들판을 뛰어다니며 싸우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그 긴 시간동안 기사는 한 판 싸우고, 잠깐 돌아와서 물 좀 마시고, 또 싸우고... 만 반복하는 겁니다. 문제는, 중세 기사의 갑옷이란 안전한 대신 입고 벗기가 굉장히 힘든 물건이라는 거죠. 볼일 좀 보려고 이것 벗었다 입었다 할 시간은 없으니까, 당연히 그냥 참거나 싸우면서 그 자리에 싸는 겁니다. 기사가 겁에 질리면(?) 더했겠죠.
전투 환경도 하등 나을 바가 없어서, 진흙탕에서 말과 사람이 뒤엉켜서 싸우니 엉망인 것은 당연했고, 전투가 여름에 벌어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 오랜 시간 뛰어다니면 흘린 땀도 미칠 지경이었습니다.(가만히 서 있어도 흐르는 땀에 죽을 판인데 -_-..)
결국 기사의 갑옷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반짝반짝한 물건이 아니라, 전투 한 판 치르면서 제구실을 하고 나면 땀, 진흙, 오물이 뒤범벅이 된 무지막지한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갑옷담당 종자는 이 엉망진창인 갑옷을 깨끗하게 닦아 정비하고, 관리하고 전투 직전에는 주인에게 입히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갑옷 닦는 일이 뭐가 힘드냐구요? 마실 물도 귀한 전쟁터이다보니 물로 못 닦고 모래, 식초 그리고 약간의 오줌을 섞어서 만든 연마제로 갑옷을 닦는 겁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니, 종자는 주인의 말도 관리해야 했고 식사 시중도 들어야 했습니다 - 이 과정은 귀족들의 에티켓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사가 끌고 온 하인들과 몇몇 병정들을 감독해서 천막을 치고, 기사가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무보수 매니저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혐오스럽고 힘든 직업을 평생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겁니다. 이 일은 기사 계급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견습인 어린 소년들에게 맡겨진 일이었거든요.
참고문헌
Tony Robinson, The Worst Jobs in History, Macmillan UK, 2007
(신두석 역, <불량직업잔혹사>, 한숲, 2005):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 온 최악의 직업들을 다룬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