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도나도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소비자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외치는 마당에 이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소비자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 는 말의 뜻을 쉽게 풀어 쓰면 이렇게 된다:

소비자가 불편함이 없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세부 사항을 잘 감춰서 신경을 쓸 필요 없게 해야 돈이 잘 벌린다.

그러니까 소비자의 눈으로 보라는 조언에는 숨겨진 전제가 셋 있는 셈이다. 첫째, 이것은 돈을 잘 벌기 위한 조언이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조언이 아닌 것이다. 둘째, 이것은 본질적으로 '감추는' 행위이다. 감춰져 있는 것을 드러나 보이게 하는 행위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돈을 잘 벌려면 소비자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는 말과 "세상을 이해하려면 생산자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는 말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2.

실제로 어떠한 분야갸 되었든,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게 되는 과정은 곧 생산자의 눈을 갖춰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컴퓨터가 어떻게 동작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사용만 해보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운영체제나 컴파일러가 어떻게 동작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 내가 지금 학교에서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아아 공룡책...

이렇게 무엇인가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은 곧 소비자의 입장에서 볼 일이 없는 내부적인 동작 방식을 깨우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생산자의 눈' 이다.

3.

그런 점에서 "소비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겠다." 라는 말은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편안하게 투정만 부리고 싶다." 는 말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다.

+1.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소비자의 눈으로 보라는 조언은 생산자의 눈을 이미 갖춘 사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생산자의 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소비자의 눈만 가지고 있어 봐야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명예 퇴직 당하고 프랜차이즈 밥집을 개업한 자영업자들을 생각해 보라 - 이 사람들은 오랫동안 소비자 역할을 해온 만큼 소비자의 눈은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이 2~3년 정도밖에 못 가서 망한다. 왜 그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