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 25일 오전 11시

전라남도 광양

장도(粧刀)의 시작은 언제 부터일까? 청동기 시대 도검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 크기가 작달막했기 때문에 단순히 짧은 칼로 치자면 칼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성싶다. 경주 금령총에서 발견된 순금으로 된 남성용 짧은 칼에서 짧은 칼이 장식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삼국 시대에 이르리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고려사>에도 작은 칼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장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장도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 초기로 여겨진다. 성종 16년에 간행된 경국대전에서는 "도자공장刀子工匠은 장도 곧 손칼을 만드는 사람이며 환도장環刀匠은 군도軍刀를 만드는 사람이다." 라 하여 민간인들의 장도와 군인들의 환도를 구분하고 있다. 이는 장도에 대한 최초의 언급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언제부터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장도를 차고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장도를 차는 풍습이 아주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좌: 조선 시대 만들어진 대뿌리장도. 대나무 밑동에 별 손을 대지 않고 칼자루와 칼집을 만든 작품이다. 우: 목을자형 장도. 금속 장식 없이 만들어진 조선시대의 장도이다.

성격 자체가 일본도처럼 살벌한 연장(?)이라기보다 장신구이다보니 장도집과 자루 등이 호사스럽게 장식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일 것이다. 따라서 장도에는 금·은·상아·수정·뿔·소뼈·대나무 등 다양한 재료가 쓰이게 되었으며 사용된 재료와 형태, 문양에 따라 이름이 붙게 되었다. 물론 신분 사회이다 보니 옥이나 금은과 같은 귀한 장도는 양반 사대부들에게나 허용되었으며, 평민들이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나무나 대나무로 만든 장도들이었다.

언뜻 보면 그저 약간씩 모양이 다른 것으로만 보일지 모르나, 장도에 쓰이는 재료나 새겨진 문양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다.

* 위 내용은 박종군 선생의 설명 및 장도박물관 전시 자료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며, 아래 장도들은 모두 박용기 옹의 작품들이다.

나전칠기 장도

목재의 칼자루와 칼집에 옻칠을 한 뒤 자개로 무늬를 놓은 장도이다. 자개의 주재료로는 빛이 영롱한 전복 껍질이 사용된다. 조선시대의 국왕들에게 진상된 장도가 이러한 형식이었다.

옥장도

전통적으로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보석인 옥으로 만들어진 장도. 상류계층의 남녀가 사용했다고 한다.

오동입사 장도

구리90% + 금, 은을 합금하여 만든 것을 오동이라 하고, 이 금속에 사람의 소변을 3개월이상 또는 3년이상 삭힌 것에 담궈 검은색으로 착색을 시키는 방식을 오동상감 기법이라고 한다. 길이 24cm. 1998년작.

칠보장도

왼쪽에 있는 칼이 에나멜을 금속의 표면에 활용해서 열을 가해 만든 칠보장도이다. 은을 주로 사용한다.

죽장도

죽장도와 목장도는 비싼 재료를 사용할 수 없던 평민들의 장도에 사용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는 절개를 상징한다. 칼자루에 인두로 문양을 새긴 것을 특별히 낙죽장도라고 한다.

죽절매화문낙죽장도. 사무실에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던 것이다. 대나무에 새겨진 절묘한 매화문이 보인다.

백동 죽절도. 1966년작.

목장도

평민들이 사용하던 장식없는 형태의 장도를 맞배기 형태라고 한다. 오동나무, 박달나무, 대추나무 등이 사용되는데 특히 벼락맞은 대추나무는 수분이 쪽 빠져 아주 훌륭한 재료로 알려져 있다. 대추나무는 귀신을 쫓는다고 하며, 장도에 쓰인 재료나 새겨진 문양에는 이렇게 각각의 의미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박달나무 은장 십이지문 갖은 맞배기도. 20.5cm. 1979년작. 칼 끝에 12지의 양이 새겨져 있다.

화류 은장 오동 맞배기도. 12cm 1974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