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최강의 도시 국가, 스파르타

3월 15일 개봉하는 액션 영화 <300>은 페르시아의 백만대군에 맞선 스파르타 인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천년이 지난 뒤에도 “스파르타식 훈련” 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는 절대 최강 전사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명성을 얻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순전히 그들이 사는 환경 때문이다.

헤라클레스의 자손들

스파르타는 150여 개나 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 중에서도 오래된 축에 속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의하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유혹하여 도망친 일로 인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스파르타는 라코니아 지방의 지명일 뿐, 보통 이야기하는 스파르타 사람들과는 별 상관이 없다. 트로이 전쟁을 치른 미케네 문명은 BC 11세기경 멸망하고, BC 8세기까지 그리스에서는 암흑 시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이 시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역사 기록이 없다. 확실한 것은 BC 10세기경 일리리아 인에게 쫓긴 도리아 인이 그리스 북방에서 남하해 와 그리스 땅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이 사건을 “헤라클레스 자손들의 귀환” 이라고 불렀다.

그 도리아 인들 중 일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남쪽 끝, 라코니아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의 중심이 된 것은 비옥한 에우로타스 계곡의 도시, 스파르타에 자리잡은 다섯 개 부족이었다. 처음에는 자기네 땅에서 한가롭게 살던 이들은 인구가 늘어나 에우로타스 계곡의 농지만으로는 먹고 살 것이 부족해지자, 주변의 도리아 부족들과 함께 세력 확장을 시작했다.

라코니아Laconia의 위치

리쿠르고스의 개혁

그러나 세력이 확장되면서 스파르타는 일찌기 없었던 사회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그 양상은 크게 두 갈래였는데, 하나는 스파르타인 스스로의 빈부 격차였고 하나는 피정복민들의 불만이었다.

BC 8세기, 스파르타와 라코니아 동맹자들은 서쪽의 메세니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메세니아 정복에서 얻은 토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토지를 가진 부자들은 더 많은 토지를 차지하여 더 큰 부자가 되었지만, 가난한 시민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재산의 양극화가 나타났다. 자연히 전리품 분배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불만을 품었다.

메세니아Messinia의 위치

뿐만 아니라 메세니아를 완전히 제압한 것도 아니었고, 상당 부분을 점령했을 뿐이기에 전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웃 나라들로 도망친 메세니아의 난민들은 그들의 지원을 받아서 스파르타에 대항했다. 게다가 스파르타가 정복한 메세니아의 주민들은 언제 반란을 일으킬 지 모르는 그야말로 시한폭탄같은 존재였다.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기도 바쁜 마당에 후방까지 불안해진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스파르타는 독특한 사회 체계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전설적인 입법자 리쿠르고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전해지나, 실제로는 기원전 7세기에 걸쳐 서서히 성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스파르타의 사회 구조

스파르타의 사회 구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스파르타 시민, 페리오이코이, 그리고 노예인 헤일로타이.

먼저 스파르타 시민은 말 그대로 도리아 5부족의 후손들로, 스파르타 시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스파르타 시민들에게는 토지와 함께 농사를 지을 헤일로타이가 분배되었다.

페리오이코이는 스파르타를 둘러싼 라코니아 도시 국가들의 시민들이었다. 이들 역시 도리아족이었지만, 이전의 토착민들과 어느 정도 혼혈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페리오이코이들은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사안들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수공업이나 무역 등의 산업활동을 하다가 스파르타가 전쟁에 들어가면 군대를 보내어 도왔다.

스파르타 인들은 이들을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정식으로 일컬을 때 라코니아 사람이라는 뜻의 “라케다이몬 사람” 이라고 했으며, 자연히 이들에게도 토지가 분배되었다.

노예 계급인 헤일로타이는 한마디로 국가 소유의 노예였다. 스파르타인들은 이들을 부려 농사를 지었다. 이들은 스파르타에게 정복당한 메세니아의 선주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자연히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존재였다. 자기 나라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의 체육 활동이 장려된 것은 스파르타 뿐이었다. 이 청동상은 스파르타의 여성 주자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헤일로타이에 비하면 1/20도 되지 않았으니, 이들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막강한 전투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스파르타의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막강한 훈련을 통해 일당백의 정예 전사로 만들어 냈다. 스파르타 시민의 직업은 전사밖에 없었다.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건 순전히 토지와 노예가 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성들도 튼튼한 아기를 낳기 위해 각종 훈련을 받았기에,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헤일로타이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여성들이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스파르타의 몰락

스파르타의 몰락은 자신들의 관습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스파르타의 전사들은 터미네이터 뺨치는 인간 병기들이었지만,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 그 수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폐쇄적인 사회 체계 덕분에 새로운 인력이 보충된 것도 아니었다. 훗날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쥐게 되자 그들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기강이 느슨해진 것도 몰락의 이유가 되었다.

스파르타의 전사를 묘사한 그림. 스파르타 전사 특유의 진홍색 망토와 대문자 람다(Λ)가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다.

스파르타가 테바이에게 패배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전사하고, 메세니아까지 잃게 되자 추락은 더 가속화되었다. 시민들을 먹여살릴 토지가 없어지자 자연히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전사의 수도 줄어들었다. 전성기 때 8천 명을 헤아렸던 스파르타의 시민은 기원전 3세기 중반에는 70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토지 소유자는 100명 뿐이었다.

스파르타를 부흥시키기 위한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기득권층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스파르타는 로마 치하의 자치도시가 되어 그 역사를 마감했다.

4 thoughts on “고대 그리스 최강의 도시 국가, 스파르타

  1. 스파르타의 노예들은 뛰어나도 죽었고 마음에 안들어도 그냥 죽었다고 합니다.
    전사계급을 무척 증오 했다더군요. 이러한 지배방식은 워낙 전사계급이 워낙 적다보니
    나타난 결과였다고 하더군요.

    • 숫자 비율이 1/20이 넘어가면 그런 식으로라도 통제를 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2. 그나마 저 사회구조도 펠로폰네소스 전쟁무렵 되면 더 세분화됩니다.
    ‘몰락한 자유시민’ 계층이 생겨버리거든요. 말 그대로 파산해버린 시민들이요.
    덕분에 자유시민이 계속 줄어만 가는(…)

    • 재방송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포스트 하단에 있는 내용을 다시 쓰는 수고를 하실 필요는 없으셨던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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