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백년전쟁은 1337 ~ 1453년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가 치른 전쟁이다.

사실: 백년전쟁이라는 전쟁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개전 시점 및 종전 시점 또한 후대의 해석이다.

백년전쟁의 시기 구분

백년전쟁을 다룬 한국어 서적은 거의 없다. 대부분 중세사 책에서 짧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게 보통인데, 그 중의 한 권인 심재윤의 는 이 전쟁을 크게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제 1기 (1337 ~ 1360) : 개전. 잉글랜드의 우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내 영토 인정.제 2기 (1360 ~ 1420 ) : 양국간 전쟁 재개, 잉글랜드의 우세.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인정.

제 3기 (1420 ~ 1453) : 프랑스 황태자 샤를 7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전쟁.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인한 프랑스의 승리. 잉글랜드의 대륙 영토 상실.

위키피디아 한글판 역시 이 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 다른 자료들은 어떨까? 일단 위키피디아 영문판은 아래와 같이 백년 전쟁을 4개의 기간으로 구분한다.> 제 1기 (1337–1360) : 개전. 잉글랜드의 우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내 영토 인정.제 2기 (1369–1389) : 전쟁 재개. 프랑스의 우세. 1기에서 빼앗긴 영토의 상당 부분 탈환.

제 3기 (1415–1429) : 전쟁 재개. 잉글랜드의 우세.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 인정.

제 4기 (1429–1453) : 잔 다르크와 프랑스의 승리.

Osprey 출판사에서 나온 The Hundred Yeads' War 1337 - 1453에 실린 시기 구분은 아래와 같다.> 제 1기 (1337 ~ 1360) / 제 2기(1369 ~ 1399) / 제 3기 (1399 ~ 1429) / 제 4기 (1429 ~ 1453)

케임브릿지 대학에서 출간된 The Hundred Years War: England and France at War c.1300-c.1450의 경우, 아래와 같이 구분한다.> 제 1기 (1337 ~ 1360) / 제 2기 (1360 ~ 1396) / 제 3기 (1396 ~ 1422) / 제 4기 (1422 ~ 1453)

지금까지 쭉 살펴보았지만, 시기 구분이 자료마다 전부 제각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백년 전쟁이라는 전쟁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백년 전쟁이란 중세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전쟁들 중 일부를 지칭하기 위해 후대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용어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전쟁의 원인은 프랑스 국왕의 영토 욕심이었다.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왕국 내의 아키텐 공작령Duchy of Aquitaine(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을 소유한 프랑스의 대영주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지역은 예로부터 와인의 명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 와인에 매겨지는 세금은 큰 수입이 되었다. 프랑스 국왕은 이것을 탐냈다. 덕분에 두 나라는 1201년 ~ 1259년, 1294년 ~ 1298년과 1324년 ~ 1327년에 걸쳐서도 같은 이유로 전쟁을 치렀다.

남부 프랑스의 가스코뉴 지방. http://en.wikipedia.org/wiki/File:MapOfGascony.png

흔히 백년이 넘게 전쟁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두 나라는 1337년이 되기 이전부터 수도 없이 싸웠다 쉬었다 싸웠다를 반복했다. 심지어 백년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1453년 이후에도 무려 100년을 더 싸웠다. 전쟁의 시기 구분이 중구난방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애시당초 작은 전쟁이 수십개니, 역사가가 분류하기에 따라 조금씩 시기 구분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개전 및 종전 시점, 어떻게 정해졌나

역사가들이 두 나라 사이의 많은 전쟁들 중 1337년 ~ 1453년의 전쟁들을 묶어 백년전쟁으로 지칭하는 이유는, 이 시기의 전쟁은 그 외의 기간에 벌어진 전쟁과 그 성격이 좀 다르기 때문이다. 1337년 이전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군대를 동원한 영토 분쟁에 불과했다. 하지만 1337년 4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 Philip VI가 가신 소집령Arriere-ban을 내리면서 양국은 자원과 군대를 총동원해서 싸우기 시작한다. 이 즈음,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 역시 전면전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336년 12월, 필리프는 에드워드에게 살인죄를 짓고 잉글랜드로 도망간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Robert of Artois를 송환할 것을 명했지만, 에드워드는 이를 거부했다. 송환만 하면 당장 전쟁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는 1337년 3월, 국회를 소집하여 6명의 새로운 백작Earl을 임명한다. 이 시기의 대귀족은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다. 누가 봐도 전면전을 각오한 전쟁 준비였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백년 전쟁은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아키텐 공작령을 두고 치른 전면전"이라고 할 수 있다. 1453년이 백년 전쟁의 끝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해 보르도 시가 프랑스 군에게 함락됨으로써 전쟁의 원인이 된 가스코뉴 지방 전체가 프랑스의 손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진 것은 1475년이다. 그리고 잉글랜드가 대륙에 남겨진 마지막 거점 칼레 시Calais를 빼앗겨 완전한 섬나라가 된 것은 1558년이다. 그러니까 보르도 함락 이후로도 100년 정도 더 충돌한 셈인데, 이 기간은 백년 전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대세가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져버려 이전만큼 치열하게 싸워댄 것도 아니거니와, 이미 가스코뉴 지방은 완전히 프랑스 영토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군이 프랑스군에게서 빼앗은 부대 상징물. http://www.flickr.com/photos/gorekun/3147175941/in/set-72157610729840417/

익히 알려진 대로, 영국과 프랑스는 그 뒤에도 계속 싸워댔다. 유럽 대륙에서 싸워댄 것은 물론이고 저 멀리 북미 대륙이나 인도에 이르기까지 군대를 동원해서 싸웠다. 1853년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두 나라의 관계는 대체로 적대적이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앙금 따위란 농담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런 걸 보다 보면, 두 나라의 국민감정이 심하게 안 좋은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 심재윤, 선인, 2005

  • 중세 영국사 전문 학자가 쓴 서양 중세사 개론서. 얄팍한 책이지만 중세사의 주요 쟁점들을 한 눈에 살펴보는 데 좋다. 대학 교양강좌 교재로 쓰려고 쓴 책 같은데, 굉장히 편하게 읽힌다. 중세 전쟁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추천.#### The Hundred Yeads' War 1337 - 1453, Anne Curry, Osprey, 2003

The Hundred Years War: The English in France 1337-1453, Desmond Seward, Penguin, 1999

The Hundred Years War: England and France at War c.1300-c.14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 영문으로 출간된 백년전쟁에 대한 저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