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가 살아있는 만화, 『유레카』
1.
기원전 218년 11월, 한니발이 이끄는 2만 6천명의 카르타고군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땅을 밟는다. 국토를 공격당한 로마는 맞서 싸웠지만, 결과는 재앙이었다. 두 판이나 내리 지고 야전군이 깡그리 날아가는 패배를 당했다. 보복을 결심한 로마는 전군을 집결, 재도전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이번엔 8만 6천에 달하는 병력이 5만 명의 한니발 군에게 전멸을 당하는, 그야말로 기록적인 대패를 당해버렸다.
로마에게 더 나쁜 소식은 그 다음에 들려왔다. 이웃 시라쿠사를 다스리던 참주 히에론이 노환으로 죽은 것이다. 그는 로마 편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건 15세밖에 안된 손자였다. 한니발은 공작원을 파견했다.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카르타고 편에 붙으면 시라쿠사가 시칠리아 섬 전체의 주인이 되도록 해주겠다고 유력 인사들을 꼬드겼다. 반란은 성공했고, 소년 참주는 살해당했다. 로마는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보복에 나섰다. 하지만 시라쿠사에는 세계 최고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와 그가 만든 싸우는 기계가 있었다. 덕분에 로마군은 한 사람의 머리가 수만명의 병사와 맞먹을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2.
이와아키 히토시의 『유레카』는 바로 그 사건을 소재로 한 단편이다. 사실, 이 전쟁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의 마르켈루스 전에 그 내용이 전하는 정도다. 『유레카』의 작가 이와아키 히토시는 뻔하다면 뻔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전쟁터에 던져진 어느 두 남녀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는데, 그 과정이 자뭇 흥미진진하다.
『유레카』의 힘은 캐릭터의 힘이다. 눈 씻고 봐도 스파르타인으로 보이지 않는 귀차니스트 청년 다미포스와 노망 든 수학자 아르키메데스, 정치꾼 에피큐데스, 그리고 흡사 금강석을 깎아 놓은 것 같은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 확실한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이 손에 잡힐 것처럼 생동감있게 묘사되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역사 기록이 흥미진진한 만화로 탈바꿈한 것은, 한 컷만 봐도 살아 있는 듯한 캐릭터들의 공이 크다.
언뜻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쉬운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 작법 등의 책을 보면 거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것이 캐릭터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초밥의 8할은 밥에서 결정된다고 하지만, 시나리오에서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도 만만치 않다. 그럴싸하고,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역사물의 경우, 은근히 이러한 점이 묻히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 정해진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사 기록은 사건의 전개에 대해서는 꽤 자세한 편이지만 캐릭터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탈각되어 있다는 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생동감을 불어넣지 못한다면, 이야기를 이끌어가기는 커녕 정해진 사건 흐름에 질질 끌려다니기 십상이다. 이따금 보는, "마네킹들이 설교 늘어놓는 듯한 역사물" 은 대개 이런 식이다.
3.
작년에 완간된 『바람의 검심』 완전판 마지막 권에는 보너스가 있다. 작가가 그린 막부 말기 인물들이다. 만화의 주인공이 막부 말기에 암살자로 활동했던 과거를 가진 인물이라 넣은 것 같은데, 한마디로 말해 최고다. 겨우 스케치 뿐이지만, 얼굴만 봐도 인물들의 면면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 구질구질한 설명 없이 스케치 하나, 설명 한두 줄만으로 살아 있는 것 같은 캐릭터를 표현한 것을 보면서 감탄했었다.
『유레카』를 보면서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잡지에서 본 기사의 일부가 떠올랐다. "왜 우리나라 만화에 나오는 장군들은 몽땅 다 '나를 따르라'밖에 외칠 줄밖에 모르는 인상들일까?" 맞는 말이다. 삼국지로 치자면 원소같은 인간만 100명이 나와서 뛰어다니는 셈이다. 그런데, 그게 재미있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4.
고등학생 시절 『기생수』를 보았을 때도 기겁했지만, 이와아키 히토시라는 작가는 보면 볼수록 살떨리도록 무서운 작가다. 그의 초기 단편선에 실린 평을 빌리자면, 이 작가는 처음부터 중견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만화책을 덮으면서, 나는 그가 몰고다니는 열렬한 팬 집단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충실한 고증과 묘사가 돋보이는 만화죠. 그런데 제목은 <히스토리에>가 맞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유레카>의 시대 배경은 <히스토리에> 하고 100년 이상 차이가 나는데요. 게다가 <유레카>는 단편이고, <히스토리에>가 장편입니다. 둘이 자매품(…)이라고는 합니다만, 헷갈리고 계신 것 같은데요.
<히스토리에> 이야기는 역사 이야기 하면서 잠깐 언급한 바가 있군요: http://blog.gorekun.com/1305
어이쿠 제가 착각했네요. 죄송합니다ㅠㅠ
내친 김에 <유레카>도 보시기 바랍니다. 좀 구하기가 힘듭니다만, 과연 명불허전이더군요 :)
크크크… 원소같은 인물 100명이… 에서 뿜었습니다. ^^
그거 상상하니까 장난 아닌걸요?
그렇데 좋은 싫든 그건 현실 아니겠습니까. 당장 이웃 일본하고 비교해봐도, 그네들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캐릭터가 우리나라에는 없죠. 전혀.
히스토리에는 정말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한동안 안 나오길래 관심을 접었었죠. 근데 유레카라는 작품을 보니 역시라는 감탄과 얼른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드네요.
이미 절판되었기에 구입은 하실 수 없으실 거고, 몇몇 대여점에서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일단 보시고 후회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_~
그렇군요..바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왕 읽고 싶다~ +_+)/
이와아키 히토시는 제가 와츠키 노부히로만큼이나 좋아하는 만화가입니다. 저런 인물은 좀처럼 보기 힘들죠.
혹 만화 보시다가 모르시는 부분 있으시면 제가 직접 가서 해설해 드리도록 하지요 -_-)>
절판이어서 살 수도 없고, 도서대여점 뒤져봐도 찾을 수 없고.. -.-;
어딜 가면 볼 수 있을지 애가 타더라구요. ㅋ
저는 대여점에서 가지고 있어서 용케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모든 대여점에 다 있는 것은 아니어서 아쉽죠. 출판사에서 재판을 찍어 준다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일단 그리기만 하면 전설이 되신다는 그분의 작품이군요…
길게 늘어뜨리지 않으면서도 한번 읽으면 10년은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그 내공은 역시 명불 허전입니다
확실히 이와아키 히토시만한 작가가 없죠. 히스토리에가 좀 더 빨리 연재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
이와아키 히토시의 인물을 묘사하는 능력에는 저도 크게 놀랍니다. 반면에 우리 만화는 100명의 원소가 날뛴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 주인공은 언제나 확고한 목표가 있고, 똘똘하거나 아니면 주변의 동료들이 많거나 둘중하나지요.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써 몇천년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히토시는 이런면을 잘 부각하고 당시의 시대상과 잘 어울려내는 것같아요. :)
ps. 그나저나 이 양반은 크게 아팠다고 하는데, 언제 이런 단편을 내놨는지…. 히스토리에는 관심을 끊은 겁니까? ㅎㅎㅎ
1. 두 가지 면을 잘 짚어주셨네요. 이와아키 히토시가 캐릭터를 생동감있게 묘사하는 데 능하다는 것, 그리고 역사책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잘 짚어낸다는 것. 뒤짚어보면, 몇 가지를 제외하면 조선시대 연인들도 지금하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요즘은 팝콘 들고 영화보러 가지만, 그 때는 누룽지나 약과 들고 풍물놀이를 보러 갔겠죠. 아, 미니스커트와 쓰개치마라는 차이도 있겠군요. 남자친구한테 예뻐 보이기 위해 쓰개치마를 열심히 튜닝했을지도…
2. “100명의 원소가 날뛴다.” 는 표현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군요. 원소가 줏대가 없는 캐릭터라 그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만, 확실히 한국 만화 – 특히 역사물의 인물들에 개성이 별로 없다는 것에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는 것 같습니다.
3. <유레카>는 <히스토리에>가 나오기 직전인가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유명세가 너무 떨어지더군요. 국내에 2005년에 출간되었으니 확실히 최근 나온 만화는 아닙니다.
빌려서조차 볼 수 없다는데 분노하여 분노의 닥터페퍼를 마시는 사람 여기 한명있습니다.
/염장 즐
100명의 원소들 앜ㅋㅋㅋㅋㅋ 완벽한 재앙이네요^^
사실 역사 만화 뿐만이 아니라 모든 만화에 통하는 이야기인거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와아키 히토시는 정말 대단한 작가죠. 저도 기생수를 처음으로 이와아키 히토시를 알게 되었지만(비록 평론가들은 그의 만화노선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하지만), 그 충격은 여전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런 작가들은 평소에 뭐하고 사는지 궁금해지더군요.
히스토리에나 유레카…보긴 봐야하는데, 기회가 잘 안나네요 쩝;
1. 극작의 기본은 캐릭터죠. 확실히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원소 100명이 뛰어다니는 한국 만화들은 좀…
2. 이와아키 히토시의 초기 단편집을 보면 사람의 신체에 대한 관심이 많이 묻어납니다. 출세작이 된 <기생수>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입니다만, <유레카>와 <히스토리에>에서는 그러한 점이 거의 희석되어 있더군요. 실력은 변함없지만, 기존의 노선에서 벗어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내친 김에 <기생수>를 다시 한 번 봐야겠네요.
우연히 일본어 스캔본을 찾아서 ‘유레카’와 ‘눈의 절벽 검의 춤’을 둘다 읽어보았습니다.
재미있더군요.
확실히 이와아키 히토시는 아주 절륜한 수준의 작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