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되고 싶었던 사나이, <레드 드래곤>
나는 인간이 아니다.변이를 거듭할 때마다 난 인간 이상의 존재로 진화했다.
곧 당신도 그걸 보게 될 거다...
1.그의 삶은 축복받지 못했다. 연쇄 살인마 프랜시스 돌하이드. 그는 근친 상간의 결과물로 세상에 태어났다. 그를 키운 할머니는 그를 미워했다. 언청이인 그를 더럽고 역겨운 괴물이라고 불렀다. 손자고 뭐고 고아원에 갖다 버려야 했다고 말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힘들 정도로 "추물"인 그의 외모만큼이나 그를 괴롭히고 있는 건, 어렸을 적 할머니에게 당한 학대의 기억이다. 그는 이빨이 튀어나온 괴물의 모습으로 할머니를 기억한다.
2.
같은 사이버펑크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인간과 기계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한 것이다. 사람의 육체가 단백질로 만든 기계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건 뭐냐는 질문이다. 나는 정답이 상당히 간단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바로 자존심이다. 객관적인 현실만을 인식하는 기계와는 달리 인간이란 제 잘난 맛에 사는 동물이다. 좀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 따위는 "자존심을 세우는 저마다의 방법" 정도밖에 안 된다.
사람은 밥만큼이나 자존심도 먹고 산다. 배고픈 이가 먹거리를 찾듯이, 자존심 고픈 이가 어떻게든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중 2병1정도 되면 귀엽기라도 하다. 온라인상에서 대단한 캐릭터 행세를 하면서 키보드 워리어질을 하거나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전도질을 해대기 시작하면 그건 이미 민폐다. 살인을 저지르면서 피해자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3.
2년 전 조승희가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를 난사했을 때, 나는 영화 의 연쇄 살인마 프랜시스 돌하이드를떠올렸다. 범죄의 형태를 제외하면 양자는 비슷한 점이 아주 많다. 삶에 필수적인 자존심이 결핍된 사람이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것. 범죄에 종교적인 상징이 동원된다는 것. 심지어 후져빠진 언론이 덜떨어진 설레발을 쳤다는 점에서까지 그렇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조승희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심하게 말더듬이라, 미국인 학생들이 "중국놈, 너희 나라로 돌아가!!" 라고 놀려댔다고 한다. 굶주린 자존심을 보상받고 싶었는지, 근력 운동에 열중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그의 우상은 총기 난사사건의 범인들이었다. 그는 1999년의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사건의 범인들을 순교자라고불렀다. 그들에 대해 자료를 수집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영웅이 된 자기 자신을 꿈꾼 것 같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신과 백성들 앞에서 당당한 영웅 말이다. "나는 모세처럼 바다를 가르고 나의 백성, 모든 시대의 연약하고 무방비인 어린이들을 이끈다." 라는 선언문을 남기기까지 했다. 그래도 몇몇 학생들이 조승희에게 좀 변해 보라고 충고했던 모양이다. "그냥 다른 사람한테 다가가서 '안녕, 잘 지냈니?' 라고 해봐." 대답이 없었다는 걸 보면 그 정도 대답도 못할 정도로 사람 앞에서 자신감을 못 느낀 게 아닐까.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강의실에 들어와 총을 난사하기 전에 한마디 했다고 한다: "안녕, 잘 지냈니? (Hi, how are you?)"
영화에 의하면, 돌하이드 역시 외로운 사람이다. 영화에서는 언청이 정도로 나오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추물" 이라고 묘사된다. 굶주린 자존심을 보상받고 싶었는지, 자기 집에 역기를 가져다놓고 열심히 근육을 키운다. 우상도 특이하다. 영원히 지하 감옥에 갇힌 인육 살인마 한니발 렉터. 그는 렉터에 대한 신문 기사들을 열심히 스크랩하고, 팬 레터를 보내고, 조언을 구한다. 렉터가 자신의 살인 행위를 칭찬하자 뛸 듯이 기뻐하기도 한다.
그는 변신을 꿈꾼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아홉 머리의 붉은 용. 그는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자기가 용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무서운 이빨을 가진 그의 할머니는 그의 생김새를 가지고 괴물이라고 불러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무서웠던 그는 이제 살인을 저지르고, 희생자의 눈에 거울을 끼운다. "자, 나를 보라. 나는 용이다. 변신중인 용이다. 나는 인간을 초월해 용이 될 것이다..."
4.
또 한 건 터졌다. 미국시간으로 지난 3일, 뉴욕주 이민센터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여 13명이 숨졌다. 원인은 분풀이. 범인은 직장을 잃은 상태에서 주변의 따돌림까지 받은 데 앙심을 품고 사건을 저질렀다고 한다. 지난 달과 올 초에도 비슷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터지고 있는 셈이다.
동기도 비슷비슷하다. 범인들은 대개 최근 경제위기로 직업을 잃었다. 직업은 성인에게 자부심의 근거2다. 그런 점에서 실직이 범인들의 자존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을지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평소 따돌림까지 받았다면 더 심할 것이다. 반면 범죄의 도구들 - 총기, 익명성 - 은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두 조건이 반응하는 한, 우리는 오래된 뉴스를 계속 듣게 될 것이다. 돌하이드는 붉은 용이 되지는 못했지만, 소설 속에서 걸어나와 육체를 가진 괴물이 되었다.
5.
"현실만큼 드라마틱한 픽션은 없다." 는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굴까?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상당히 독특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보통은 피해자를 자신과 또는 내 이웃과 동일시하여 피의자를 증오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련인데…
암튼 아주 잘 봤습니다. 유익한 리뷰였습니다. ^^
참.. 자주 들르는데 이제서야 댓글을 남기네요… 죄송…. ;;
개인적으로 인간이라는 동물은 선악으로 나눠서 증오하기엔 상당히 복잡한 동물 같습니다. 조승희나 돌하이드 따위를 동정하는 건 아닙니다만(제 앞에 있다면 단칼에 베어버릴지도), 그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거겠죠.
유익한 리뷰라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성경에 나오는 짐승은 머리 일곱개 아니었냐능(….)
…퇴소하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어핀드님의 예리한 시각의 글 잘 읽었습니다.
대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훌륭한 글 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사상이 지배하는 서구에서는 선과 악의 이원론적 잣대로 삼라만상을 평가 하고 상징적으로 정해 놓은 절대 善이라는 예수를 믿고 따르면 착한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그 반대 쪽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惡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선과 악이 한 몸에 있는 일원론적 철학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기에 그 누구라도 선행을 하고 혹독한 자기수양에 의해 선한 결론을 얻어 낼수 있다고 하는게 서양과 다른것 같습니다..
‘레드드래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서양인들이 만든 영화들은 이원론적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지만 최근의 동양 특히 매우 서구화 되어버린 한국의 영화들 에서도 ‘선과 악’을 따로 떼어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수법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남녀,빈부,여야,남북,한일문제’등을 이야기 할때는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서구적인 절대 잣대로 우리 자신을 평가 했는지 모를 정도로 변한것 같습니다..
조승희 문제 같은 경우는 그 개인의 조건으로 볼때 악조건이 겹쳤던것 같습니다.
본인의 자폐적 성격에 전형적인 이민 1세대로 사회적 하위 레벨인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님의 무관심과 소수민족 아이로서의 사회적 왕따등이 그를 ‘레드드래곤’ 같은 괴물로 만들어 버린것 같습니다..
차라리 조승희도 그 엄청난 일을 벌이기 전에 부모님의 관심이나 영화 ‘레드 드래곤’ 속에서 처럼 ‘Francis Dolarhyde’를 잘 이해 해주고 사랑하는 비록 앞을 못보는 맹인 이었지만 ‘Reba McClane’ 같이 착한여자를 만났다면 어떠했을까?
이 영화가 앞을 못보는 그녀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우리도 외모나 사회적 조건만을 따지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을 다 사랑 할수 있다!”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 해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1. “그 누구라도 선행을 하고 혹독한 자기수양에 의해 선한 결론을 얻어 낼수 있다.” 는 것도 결국 선악의 이분법으로 보입니다. 제 알기에 동양적 사고는 선악의 대립 구도라기보다 호오(好惡) 쪽에 좀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2. “사회적 조건만을 따지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을 다 사랑 할수 있다.” 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동양은 ‘선, 악’의 구분 개념 이라기 보다는 ‘음,양’의 개념이 더 강했겠죠..
그러기에 ‘실체와 그림자’, ‘남과 여’, ‘해와 달’ 처럼 음과 양은 자연의 이치대로 절대
상관에 의한 일원화가 자연스럽게 됐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또 그들은 體와 用의 끈적한 관계로 음과 양을 둘이 아닌 하나로 붙들어 두려 노력도 한것 같습니다..
동양인들이 자기 수양하에 선한 결론을 낼수 있다 함은 결국 자신의 내면의 악을
억제하고 선을 표출하는 행위 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惡을 완벽하게 버릴수는 없는 것으로 인정하기에 ‘限, 業, Karma’등의 개념을
남겨둔것 같습니다.
즉, 동양인들은 내면에는 항상 억제 되어있는 ‘惡의 존재’가 있음을 번민하고 살아 온것 같습니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대자연’을 神이라는 이름의 절대자로 불렀기에 “대자연에 反하는 것은 악으로, 順하는 것은 선으로 이름짓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그러기에 서양인들은 자신이 神을 섬기는 선한 측이라 생각하면서 악을 행할수가 없다고 생각 하는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神을 섬기는 자가 행하는 것은 모두 절대 善 이라는 자기최면 속에서 사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동, 서양의 선과 악의 한계가 점점 모호 해지는 세월 인것 같습니다.
감사 합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