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석궁

http://www.flickr.com/photos/bbmexplorer/3741617891/

투구의 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석궁Crossbow1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오해 중 하나는 “백년전쟁 당시 잉글랜드군이 갑옷을 뿡뿡 뚫는 석궁을 사용해서 프랑스 기사들을 박살냈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원복 교수가 에서 괴상한 소리를 해 놓은 게 가장 큰 원인입니다만, 이러한 오해와는 별개로 석궁은 유럽의 무기 발달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비록 그만큼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공성기에서 야전 병기로

석궁이 어디에서 발명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동서양 양쪽 모두 기원전 5세기에는 석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양쪽에서 따로따로 발명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러한 자료의 출처인데, 서양의 경우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Diodorus Siculus의 책에서, 동양의 경우 묵자(墨子)의 비공론에서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공성전을 다룬 내용이라는 겁니다. 이 점은 석궁에 있어서 중요한 특성을 암시합니다. 석궁은 강력한 공격력과 사정거리를 가지는 반면 장전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따라서 대량 생산하여 운용하지 않으면 야전에서 효과를 보기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성전에서 먼저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석궁은 생산하는 데 금속 세공 기술도 필요합니다. 석궁은 고대 그리스 – 고대 로마를 거쳐 중세 유럽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만, 이러한 제약 때문에 야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2습니다.

석궁을 쏠 수 있도록 설치된 十자형 총안. 런던 탑. http://www.flickr.com/photos/pembleton/3294469694/

석궁 사용에 있어서 “규모의 경제” 를 달성하는 데 성공한 것은 해안의 교역 도시들 – 특히 제노바,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었습니다. 해적질이 일상화된 시대였던 만큼, 사정거리가 긴 석궁은 무역선 보호에 안성맞춤인 무기3였기 때문입니다. 재료 입수가 쉽고 공업 기술이 발달되어 있다는 배경도 있어서, 이들 도시들은 곧 석궁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 등장한 제노바 석궁수. 제노바의 석궁수들은 프랑스 국왕에게 고용되는 등 명성을 날렸다.

이러던 석궁은 1차 십자군(1095-1099)을 계기로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됩니다. 십자군 원정에 참전한 제노바 석궁병들은 예루살렘 공성전(1099)에서 대활약, 십자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곧 이들은 석궁병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고, 12세기에 걸쳐 유럽 전장의 궁수들은 석궁수로 교체되게 됩니다.4

갑옷과의 경쟁

중세의 전형적인 석궁. 오른쪽에 보이는 기구는 장전을 도와 주는 도구다. http://www.flickr.com/photos/awrose/3872463545/

확대사진 – 석궁의 장전을 도와 주는 등자(Stirup). 발을 여기에 건 다음 양팔로 활줄을 당기면 장전 도구 없이도 비교적 빠르게 장전할 수 있다. http://www.flickr.com/photos/awrose/3873249072/

석궁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기존의 기사들은 위협받기 시작했습니다. 일생 동안 전투 기술을 연마한 기사를 일개 석궁수가 잡아버릴 수 있게 되었거든요. 이미 1139년 제 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무시무시한 무기” 란 이유를 들어 석궁 사용을 금지하는 결정이 내려진 바 있었지만, 별 효력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1282년, 석궁을 사용한 카탈루냐 용병대는 시칠리아 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기사들을 박살내버리는 기염을 토합니다.

중세 전쟁사에서 석궁이 일반화된 1300년 이후가 하나의 분기점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기사들의 전투력이 의심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기점으로 투구·갑옷과 같은 기사들의 방어구는 급속한 발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반면 장창으로 무장한 보병과 석궁병을 운용해서 기사를 무력화하는 방법 또한 연구되었습니다. 이렇게 석궁은 16세기 초에 이르는 약 200년간 갑옷과 경쟁하면서 더 빠른 장전시간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도록 발달해가게 됩니다.

화약 병기의 등장

http://www.flickr.com/photos/27467248@N07/3993283635/

16세기 초를 지나면서 석궁은 전쟁 무기의 지위에서 내려와서 사냥·레저용으로 그 자리를 옮기기 시작합니다만, 갑옷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투사무기쪽 선수가 석궁에서 화약병기로 교체되었을 뿐이죠. 화약병기와 갑옷의 대결 또한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만 결국 승리자가 된 것은 화약병기였습니다. 말탄 기사와 판금 갑옷의 시대 또한 이와 함께 끝났습니다.

중세에 대한 이미지가 기사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석궁은 그 중요도에 비해 큰 관심을 받는 무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역사를 한 단계 밀어 보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낮게 평가될 무기는 결코 아닐 겁니다.

참고문헌

  • William H.Mcneill,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 이내주 감수 · 신미원 옮김, 이산, 2005)

  • R.G.Grant,

    – Gary Embleton / John Howe, , Combined Publishing, 1995

    – Christopher Gravett, , osprey, 2000


  1. 석궁이란 “돌을 쏘는 활” 이라는 의미인 만큼, 정확히 이야기하면 ‘쇠뇌’ 가 맞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석궁이라는 표현이 훨씬 일반적이므로 그대로 쓰도록 합니다. 

  2.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 해롤드와 벌인 헤이스팅스 전투에 대한 기록이 중세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지만, 유럽 전역에서 일반적인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3. 특히 돛대 위에 있는 망루에 석궁수를 배치할 경우 막강한 방어력 증가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4. 십자군 전쟁은 석궁의 확산에도 기여했습니다만, 반대로 석궁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합성궁 기술이 석궁에 도입되면서 공격력이 더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이슬람권은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석궁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20 thoughts on “중세 유럽의 석궁

  1. 대항온에서, 이탈리아 명산품 중 하나가 바로 석궁이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가서 멋진 놈들을 구경했지만 사진이 흐리게 나와서 안습.

    슬링도 그렇지만, 이놈도 현대 과학과 만나서 괴물로 재탄생.

    • http://me2day.net/gorekun/2009/12/08#12:07:38

      대항해시대의 교역품 목록은 역사물의 모범을 보여 준다고 할까요, 아주 훌륭합니다. 제 기억에, 런던에서는 갑옷이 특산물이었지요. 그리니치에 있었다는 갑옷 공장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것 같습니다.

  2. 석궁이.. 갑옷을 뚫는게 아니란 건가? 오해란게..
    일단 활보다 사정거리가 넓다는 거군..?

    • 1. 석궁이 갑옷의 판금을 쉽게 뛇지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갑옷과 석궁이 서로 경쟁을 했던 거구요.
      2. 석궁을 사용한 건 잉글랜드 군이 아니라 프랑스군입니다. 잉글랜드 군은 장궁을 사용했습니다.

  3. 요즘 나오는 레져용 석궁은 연속 장전 발사가 가능하지 않나요?
    실제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해서는 그런 석궁(석궁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이 꽤 나오던데…
    조준점도 있어서 꽤 정확한 듯…

    그래서 그런지 하나 가지고 싶네요.

    • 아마 연속 장전이 될 겁니다. 본 기억은 안 납니다만, 정교한 조준경이 장착되어 있는 걸 보면 두세 발 정도 연속사격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 디지츠 // 그 탄창 달린 석궁은 본래 중국에서 쓰던 것인데, 작가가 그냥 넣었더군요. 상당히 무기 덕후 기질이 다분한 듯.

  4. 석궁이 틀린 말이라는 소리는 제가 자료 조사해 본 바로는 민승기씨가 저서’조선의 무기와 갑옷’에서 말한 게 처음인 것으로 보입니다. 책에서는 근거로 돌을 쏘는 거는 스톤 보우라는 게 따로 있다라고 주장하고, 실제로 그런 게 있긴 하죠. 근데 같은 십자활 분류에 들어가는 물건이고, 동양의 쇠뇌 중에도 탄노라고 해서 돌을 쏘는 노가 있어 석궁이란 번역이 사실 그렇게 틀린 건 아닙니다. 민승기씨 책이 한국의 무기 개설서 중에서는 사실상 최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만, 틀린 부분도 찾아보면 많습니다.(판옥선에서 전투를 아래갑판에서 했다고 주장하지 않나, 소승자총을 임란 이후 만들어졌다 하질 않나…)
    그리고 베르세르크 작가분이라면 실제로 무기덕후 맞다고 하더군요.

    • 1. 제가 기억에 민승기 님의 책 이전에도 자주 제기되던 이야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시면 괜찮겠군요. 석궁으로 검색하면 결과가 3개 나오는데(수정실록 포함 4개), 2개는 이름에 쓴 石자와 연결된 것이고 하나는 활의 강도를 이야기할 때 나옵니다. 반면 노(弩)로 검색하면 결과가 상당히 많이 나오죠.

      2. 설마 민승기 님의 책에 자잘한 오류가 많은 거 이제 아셨나요? 이거 실망인데요.

  5. 일단 그놈의 석궁/쇠뇌 문제가 대중화된 건 민승기님이라고 봅니다.
    민승기님 책에 자잘한 오류 많은 거야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요. 문제는 책이 하도 없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민승기님의 책이 준 영향이 크니까요. 심지어 민승기님 책은 페리 형제손에까지 들어가, 앞으로 페리 형제가 고증하는 조선군은 그 책 위주로 고증되게 되었으니 어찌 아니 통탄할 노릇이겠습니까.

    • 1.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석궁, 혹은 탄궁이 쇠뇌의 일부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전체 쇠뇌의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한, 쇠뇌를 석궁으로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흔히 i386 아키텍쳐를 가진 컴퓨터를 개인용 PC라 부르는데, 이것은 이 아키텍쳐를 가진 PC가 개인용 PC중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맥킨토시나 다른 구조의 컴퓨터들은 워낙에 점유율이 미미해서 개인용 PC라는 단어 대신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네덜란드를 흔히 홀란드라 부르는 것도 주요 도시가 몽땅 홀란드 주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2. 자잘한 오류가 꽤 있기는 한데, 그건 앞으로 차차 역사 동인들이 보완하고 고쳐 나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워해머 피규어 만드는 분들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솔직히 저는 큰 문제가 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6. 원래 쇠뇌 자체가 돌도 쏘지 않습니까? 특히나 상자노 같은 거라면 돌도 많이 사용하는 걸로 압니다만…삼재도회의 상자노들을 봐도 돌을 쏘는 걸로 보이는 것도 여렷 되고 말이죠. (아, 상자노는 좀 크니 열외로 해야 할려나요;;)협의로 세세하게 나눈다면 당연히 틀리겠지만, 광의로 뭉뚱그려 한다면 그렇게 많이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봅니다. 뭐 솔직히 정확성이나 순우리말이라는 점이나 쇠뇌가 제일 맞겠죠.

    • 제가 바로 위에 달아 놓은 덧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엄연히 일반적인 것이 아니므로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살을 쏘는 쇠뇌가 엄연히 일반적입니다.

  7. 고어핀드님의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에 본 외국 책에서는 스톤 보우류와 크로스 보우류를 특별한 구분 없이 같이 설명하며, 단지 화살을 쏘지만 돌을 쏘는 종류도 있다 식으로 설명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그 책에서 소개하는 서양 쇠뇌들의 경우 개인용 쇠뇌라 하더라도 돌을 쏘는 종류도 상당히 많더군요. 오히려 화살(볼트 제외)을 쏘는 게 더 적어 보였을 정도였습니다.

  8. Crossbow를 석궁이라 번역하는건 명백한 오류죠. 차라리 십자궁이라는 말이 더 나은….
    (옛날 책 중에는 이렇게 번역된 것들도 있더군요.)

    애초에 Crossbow 라는 단어자체에 돌 石자가 끼어들 이유가 없고
    (stone bow라면 石弓이라고 직역할 수 잇겠지만.)
    Crossbow의 수많은 종류 중 일부가 stone bow 이니
    stone bow를 crossbow의 대표격으로 사용할 이유도 없지요.

    현무지신 님께서 언급하신 [화살을 쏘지만 ‘돌을 쏘는 종류도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crossbow 류에서 stone bow가 비주류라는 말이 되는데…

    어떤 경로를 통해 Crossbow의 번역어로 석궁이 일반화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근원적으로 따지자면 별로 좋은 번역은 아니라 봅니다.

    • 동의합니다. 어쩌다 석궁이 대다수 언중들을 확보하게 되었는지, 저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이 글에서는 석궁이라고 썼지만 다른 글에서는 쇠뇌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앞으로도 석궁이라는 말은 최대한 안 쓰려고 합니다.

    • 미스트//굳이 변명을 달자면 stone bow 역시 crossbow범주에 들어가고, 석궁이란 말이 많이 퍼져서 미스터술탄님처럼 이미 굳을 대로 굳은 말이니 적당한 말 쓰면 되지 않느냐 하는 주의였는데…(마침 저 덧글을 쓸 시기에 밀군카에서 저거 관해서 논쟁도 좀 있었고) 지금은 그때그때 편한 대로 부르는 중입니다.

  9.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오해 중 하나는 “백년전쟁 당시 잉글랜드군이 갑옷을 뿡뿡 뚫는 석궁을 사용해서 프랑스 기사들을 박살냈다.” 는 것입니다.<< 정설은 어떤건가요? 어제 아들이 이 잉글랜드 석궁병 이야기를 해서 '그게 아닌것 같다고 읽었다'고만 답해줬습니다. -_-

    • 물론 제 쪽이 정설입니다. 위키피디아나 시중에 나와 있는 다른 책들 (「전쟁의 얼굴」등)을 읽어보시면, 석궁(=쇠뇌)을 사용한 쪽은 오히려 프랑스군 쪽이라는 걸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사실, 이원복 교수의 책에는 역사적 오류들이 너무 많아서 어디어디가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을 지경입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