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만 바꾸면 되는 이야기 3

* 이 글은 시리즈의 토막글입니다.

한 신문사는 장차관, 국회의원 자식들이 유난스레 많다. 거기서 오랫동안 편집국 지휘봉을 잡았던 대선배에게 따졌다. “고관대작 자식들은 뭐가 다릅니까?” 되레 묻는다. “김 기자 클 때 아버지 책꽂이에 책이 몇 권이나 꽂혀 있었나? 놀러 오는 아버지 친구들은 직업이 뭐였나?” 말문이 막힌다. “책 구경이라도 더 했을 거고, 아버지 친구들이 다 중요한 취재원이잖아.”

– 김의겸, 어느 기자의 이중생활>, 한겨레, 2009-12-09

1.

http://www.flickr.com/photos/bluefootedbooby/370462923

고려 조정에는 귀족집 자식이 많다. 상서성 고위 간부에게 따졌다. “귀족집 자식들은 뭐가 다릅니까?” 되레 묻는다. “자네 클때 서고에 책이 몇 권 있었나? 놀러 오는 아버지 친구들은 직업이 뭐였나?” 말문이 막힌다. “글 쓰는 거 구경이라도 했을거고, 아버지 친구들이 다 고위 관료잖아.”

2.

http://www.flickr.com/photos/8765199@N07/3900169424

한 영주님의 봉신 중에는 기사 집 아들이 유난스레 많다. 오랫동안 영주님을 섬겨 온 노기사에게 따졌다. “기사 집 자식들은 뭐가다릅니까”? 되레 묻는다. “자네 클 때 집에 말이 몇 필 있었나? 놀러 오는 아버지 친구들은 직업이 뭐였나?” 말문이 막힌다.”말 타는 거 구경이라도 했을 거고, 아버지 친구들이 다 전장에서 지휘관들이잖아.”

3.

http://www.flickr.com/photos/lwr/3378700109/

태합(太閤) 히데요시(豊臣秀吉) 공 아래서 정무를 총괄하는 미쓰나리(石田三成) 대감 아래에는 대상인 집 자식이 꽤 많다. 거기서오랫동안 일을 해왔던 가로(家老)께 따졌다. “유키나가(小西行長)같은 대상인 아들은 뭐가 다릅니까?” 되레 묻는다. “자네클 때 아버지 방에 장부가 몇 권 있었나? 놀러 오는 아버지 친구들은 직업이 뭐였나?” 말문이 막힌다. “주판 쓰고 장부정리하는 거 구경이라도 했을 거고, 아버지 친구들이 다 세금 내고 물건 납품하는 애들이잖아.”

4.

http://www.flickr.com/photos/charlesfred/3300079511/

뉴욕의 한 고급 로펌에는 명문가 출신이 많… 아니, 전부다. 거기서 오랫동안 일을 해왔던 간부에게 따졌다. “흰 피부에 파란 눈 가진 친구들은 뭐가 다릅니까? 동유럽에서 이민온 유태인 아들은 안 됩니까?” 되레 묻는다. “자네 클 때 어떤 사람들과 여름 방학을 보냈나? 놀러 오는 아버지 친구들 지위가 어땠나?” 말문이 막힌다. “우린 상류층 일을 처리하는 고급 로펌이야. 함께 교회 가고 휴가 보내는 사람들 일 말야. 위임장 싸움 같은 상놈들 일 하는 데가 아니란 말야.”

===== ===== ===== ===== =====

흔히들 세습이라고 하면 재산이나 지위를 생각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능력의 세습이다. 재산이나 지위는 잃어버리기도 쉽고, 사회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렇지도 않다. 개인과 사회에 따라 편차가 있을 뿐, 잘 잃어버리지도 않고 비난도 받지 않는다.

  • 심지어 “너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교육 잘 받아서 그런 거잖아.” 하는 소리가 들리면 “실력도 없는 넘이 찌질대기는 ㅋㅋㅋㅋ” 하면서 비웃으면 된다.

마지막 이야기는 말콤 글래드웰의 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렉산더 비켈이라는 변호사의 이야기이다. 그는하버드 로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명문 로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루마니아에서 이민 온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이었다. 비켈이 졸업할 당시 명문 로펌들은 상류층들을 위한 일을 주로 처리했기 때문에, 비켈 같은 뜨내기는 거기 낄 수 없었다. 비켈이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은 기업간 인수합병이나 소송 같은 “천한” 일 뿐이었다.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비켈은 그래도 운이 좋았다. 70년대 이후 규제가 완화되면서 기업간 인수 합병이나 소송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떴고”, 거부가 됐다. 반대로 오사카 대상인의 아들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운이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의 무장들이 죽여버리겠다고 덤벼든 탓이다.

“호랑이” 가토 기요마사. 의 일러스트.

이들은 히데요시가 출세하기 전부터 그를 섬겨 온 무장들(‘무단파’)이었고, 자연히 유키나가처럼 관리 능력을 무기로 출세한 이들(‘문치파’)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심지어 고니시 유키나가가 순천에서 이순신 함대에 포위당했을 때, 부산에서 철군을 준비중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아는 척도 안 했다.

결국 거제도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나서서 유키나가를 구해 오긴 했지만, 결국 그는 무단파들에 의해 다른 문치파들과 함께 목이 떨어지는 신세가 됐다(1600).

16 thoughts on “명사만 바꾸면 되는 이야기 3

  1. 글래드웰….요즘 미국에서 싸우고 있는 꼴이나, 요약된 그의 책 내용을 들어보건데 그닥 신뢰할만한 사람은 못되겠더군요. 물론 인용한 예시야 별로 상관이 없지만 말입니다…

  2. 우리 딸은 유치원에서 산타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그리라고 했더니 책 세권이랑 풍선 하나를 그렸더군요.

    • 책을 선물로 받고 싶어하는 것도 부모님을 닮아서 그런 것 같네요. 좋든 싫든, 가정 환경은 무시하기 힘들죠.

  3. 마지막 예시는 심히 공감이 됩니다. 실제 우리나라 로펌도 그러니까요(……)

    • 뭐 신분이 분화되면서 우리나라 로펌도 갈수록 저런 모습을 띠어가겠지요. 30년 전만 해도 사법고시로 인생역전 같은 케이스(ex. 노무현)가 있었습니다만.

  4. 언젠가 페리스코프님 블로그에서 읽은 『일본의 세 가지 격차』란 글이 떠오르네요.
    격차의 세습이 고착화된다는.
    페리스코프님은 일본사회가 우리보다 이런 면에서 한발 빠르게 진행된다고 했지만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우리가 일본 앞지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듯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http://blog.periskop.info/135 이 글 말씀이군요. 저도 이 글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는데, 생각해보니 이 포스트와도 통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방금 전 periskop 님 글에 트랙백 걸었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