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쇠뇌
투구의 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석궁1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오해 중 하나는 "백년전쟁 당시 잉글랜드군이 갑옷을 뿡뿡 뚫는 석궁을 사용해서 프랑스 기사들을 박살냈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원복 교수가 에서 괴상한 소리를 해 놓은 게 가장 큰 원인입니다만, 이러한 오해와는 별개로 석궁은 유럽의 무기 발달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비록 그만큼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공성기에서 야전 병기로
석궁이 어디에서 발명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동서양 양쪽 모두 기원전 5세기에는 석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양쪽에서 따로따로 발명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러한 자료의 출처인데, 서양의 경우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Diodorus Siculus의 책에서, 동양의 경우 묵자(墨子)의 비공론에서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공성전을 다룬 내용이라는 겁니다. 이 점은 석궁에 있어서 중요한 특성을 암시합니다. 석궁은 강력한 공격력과 사정거리를 가지는 반면 장전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따라서 대량 생산하여 운용하지 않으면 야전에서 효과를 보기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성전에서 먼저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석궁은 생산하는 데 금속 세공 기술도 필요합니다. 석궁은 고대 그리스 - 고대 로마를 거쳐 중세 유럽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만, 이러한 제약 때문에 야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2습니다.
석궁 사용에 있어서 "규모의 경제" 를 달성하는 데 성공한 것은 해안의 교역 도시들 - 특히 제노바,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었습니다. 해적질이 일상화된 시대였던 만큼, 사정거리가 긴 석궁은 무역선 보호에 안성맞춤인 무기3였기 때문입니다. 재료 입수가 쉽고 공업 기술이 발달되어 있다는 배경도 있어서, 이들 도시들은 곧 석궁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던 석궁은 1차 십자군(1095-1099)을 계기로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됩니다. 십자군 원정에 참전한 제노바 석궁병들은 예루살렘 공성전(1099)에서 대활약, 십자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곧 이들은 석궁병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고, 12세기에 걸쳐 유럽 전장의 궁수들은 석궁수로 교체되게 됩니다.4
갑옷과의 경쟁
석궁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기존의 기사들은 위협받기 시작했습니다. 일생 동안 전투 기술을 연마한 기사를 일개 석궁수가 잡아버릴 수 있게 되었거든요. 이미 1139년 제 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무시무시한 무기" 란 이유를 들어 석궁 사용을 금지하는 결정이 내려진 바 있었지만, 별 효력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1282년, 석궁을 사용한 카탈루냐 용병대는 시칠리아 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기사들을 박살내버리는 기염을 토합니다.
중세 전쟁사에서 석궁이 일반화된 1300년 이후가 하나의 분기점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기사들의 전투력이 의심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기점으로 투구·갑옷과 같은 기사들의 방어구는 급속한 발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반면 장창으로 무장한 보병과 석궁병을 운용해서 기사를 무력화하는 방법 또한 연구되었습니다. 이렇게 석궁은 16세기 초에 이르는 약 200년간 갑옷과 경쟁하면서 더 빠른 장전시간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도록 발달해가게 됩니다.
화약 병기의 등장
16세기 초를 지나면서 석궁은 전쟁 무기의 지위에서 내려와서 사냥·레저용으로 그 자리를 옮기기 시작합니다만, 갑옷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투사무기쪽 선수가 석궁에서 화약병기로 교체되었을 뿐이죠. 화약병기와 갑옷의 대결 또한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만 결국 승리자가 된 것은 화약병기였습니다. 말탄 기사와 판금 갑옷의 시대 또한 이와 함께 끝났습니다.
중세에 대한 이미지가 기사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석궁은 그 중요도에 비해 큰 관심을 받는 무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역사를 한 단계 밀어 보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낮게 평가될 무기는 결코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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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궁이란 "돌을 쏘는 활" 이라는 의미인 만큼, 정확히 이야기하면 '쇠뇌' 가 맞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석궁이라는 표현이 훨씬 일반적이므로 그대로 쓰도록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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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 해롤드와 벌인 헤이스팅스 전투에 대한 기록이 중세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지만, 유럽 전역에서 일반적인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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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돛대 위에 있는 망루에 석궁수를 배치할 경우 막강한 방어력 증가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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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은 석궁의 확산에도 기여했습니다만, 반대로 석궁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합성궁 기술이 석궁에 도입되면서 공격력이 더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이슬람권은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석궁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