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방탄은 Bulletproof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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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두기: 원래 이 글은 지난 월드 피겨스케이팅 챔피언쉽 2011에 맞춰서 공개하려고 했으나, 정작 그 때 학교에서 연달아 밤을 새는 바람에-_- 공개 시기를 놓쳤습니다. 이제야 시간이 났으므로, 손질해서 올립니다.

All That Skate Summer 2010에서의 김연아 갈라쇼 『Bulletproof』.

기사에 대한 도전: 14세기~16세기

중세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중세의 시작부터가 3세기~8세기로 각기 다르게 잡을 수 있는 데다가, 끝도 15세기~17세기 등 갖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지요. 하지만 대체로 중세 전성기라고 하면, 10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 시기, 유럽 사회를 특징지었던 것은 정치적으로는 봉건 제도, 정신적으로는 기독교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기사들의 집단 돌격 – 충격 전술의 우위가 의심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4세기로 넘어면서 이게 양상이 좀 달라집니다. 기사의 막강한 전투력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거지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슬람권과의 대결 과정에서 연구된 보병 대열의 효율적인 활용법이 유럽 대륙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탓도 있고, 용병 생활로 경험을 쌓은 보병들이 늘어난 것도 여기에 한 몫 했습니다.

http://www.flickr.com/photos/arjuarez/2837956669/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투사 무기[missile weapon]가 발달했다는 겁니다. 12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 보급된 쇠뇌[弩, Crossbow]는 각종 개량이 이루어지고 그 수가 늘어나면서 13세기에 이르면 기사 부대를 박살내버릴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갑옷에도 쇠뇌에 대한 방어력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300년대 이전까지, 유럽의 갑옷은 쇠사슬 셔츠[허버크Hauberk]을 베이스로 이것저것 보조 장비를 착용하는 수준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1300년대 이후 허버크 위에 철판을 덧대는 방식으로, 결국은 우리 눈에 익숙한 판금 갑옷[Plate Armor]으로 진화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보병 무기의 강화는 기사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요인이 바로 쇠뇌입니다.

철포와 갑옷의 대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Charles V)를 위해 만들어진 권총. 장전 방식은 휠락(wheel-lock)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총기들 중 하나다. 손잡이가 매우 인상적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1500년대를 넘어가면서, 새로 등장한 철포[鐵砲, 혹은 총통銃桶]는 쇠뇌의 자리를 차츰 대체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갑옷의 새로운 경쟁 상대는 철포가 되었지요. 갈수록 공격력이 올라가는데다가 쇠뇌처럼 장전하는 데 힘 쓸 필요도 없다1는 점에서 철포는 갑옷의 무서운 천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갑옷들 역시 충분히 단단해서 철포의 총알을 막아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럼 금속 공학도 없던 시절에 막 만들어진 갑옷이 방탄이라는 걸 어떻게 알까요?

간단합니다.

직접 총알(Bullet)을 쏴서

관통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임(Proof)으로써,

방탄(Bulletproof)인지 확인하는 거죠.

뒤집어 말하면, 철포로 쐈는데 부서지지 않는 갑옷이 곧 방탄 갑옷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철포 사용이 확산된 1550년~16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갑옷들 중에는 조금 기묘하게 생긴 갑옷들이 있습니다. 일단 이것들은 굉장히 두껍고 무겁습니다. 방어력을 높여야 하니까 당연한 거겠죠? 그리고 또 하나, 가슴 부분만 있어서 편하게 입고 벗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당연합니다. 이 무거운 걸 계속 입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이것들에는 왼쪽 가슴 언저리에 작고 동그란 흠집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바로 방탄 테스트의 흔적입니다. 직접 총을 쏴서 테스트를 하니까, 총알에 의한 흠집이 남게 되는 것이지요.

1590년~1600년경 만들어진 공성용 흉갑(Siege Cuirass). 공성 작전중에 걸치는 것으로 무게가 11kg이 넘는다! 맨 오른쪽에 있는 흠집이 왼쪽 가슴 부분에 해당한다. 이 갑옷에는 이것 말고도 많은 총탄 자국들이 나 있는데(이 사진만도 2개), 그만큼 착용자의 생명을 여러 번 구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http://www.flickr.com/photos/gorekun/5457630018 에서 확인할 수 있다. Higgins Armory 소장.

방탄 기능을 위해 갑옷 두께를 늘리는 추세는 1600년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덕분에 이 시기의 갑옷들은 정말 구분하기가 쉽죠 – 철판이 너무 두꺼워서 둔중해 보일 정도거든요. 물론 그만큼 다른 부분의 무게를 덜어야 했기 때문에, 이 갑옷들은 이전의 갑옷들과는 달리 다리 보호구도 없고(이것이 포인트) 말에 마갑도 씌우지 않습니다. 사실, 다리 보호구라는 게 보병이 돌격해 들어간 기사의 다리를 자를 염려 때문에 생긴 것인데 이 시기가 되면 기병들도 웬만해선 다 권총 들고 싸우거든요. ‘기병’ 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이 시기가 되면 더이상 ‘기사’도 아닙니다.

그나마 이렇게 둔중한 갑옷들도 1650년대를 넘어가면서 완전히 전장에서 퇴출됩니다. 가슴 보호에만 집중하는 가벼운 갑옷의 시대가 오는 것이지요.


  1. 쇠뇌의 공격력이 올라가는 만큼 장전도 힘들어졌기 때문에, 각종 보조 도구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물론 장전 시간도 그만큼 오래 걸린다! 

4 thoughts on “왜 방탄은 Bulletproof일까?

  1. 과연… (왠지 총알을 맞으면 갑옷의 내구가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역시 방탄갑옷의 효능은 직접 총을 쏴서 보는 거군요. 그런데 저 정도의 갑옷 정도면 머스킷을 막을 수 있는 건가요?

  2. 머스킷 탄환 에너지가 2000줄까지도 가는데 대부분의 불렛프루프 자국은 300~600줄 이내의 충격을 받은 자국이라고 하더라구요 ㅎㅎ

    • 구체적 수치가 그렇게 되는군요. 어떻게 보면 그 수치 자체가 갑옷 진화의 일면을 정확히 반영한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 다 아시겠지만… 서구의 총통은 휠락(wheel lock), 매치락(match lock), 플린트 락 머스킷(flint lock musket)의 순으로 발달합니다. 여기서 갑옷의 시대는 대략 매치락 까지죠. 뒤집어 말하면 매치락을 넘어서는 강도의 총은 막아내지 못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만큼 매치락과 머스킷의 강도 차이가 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머스킷은 발사하는 사람에게도 무지막지한 반동을 요구해서, 어깨에 걸쳐 놓고 쏴야 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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