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폴로지(Topology)
- 이 글은 원래 인터넷 주인찾기 제 3회 컨퍼런스, "소셜시대, 블로그의 재발견"에 발표하기 위해 기획되었으나, 주인장 사정[^1]으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늦었지만 블로그에 올립니다.
1.
컴퓨터 과학에는 그래프(graph)라는 게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몇 개의 점(정점, node)들을 선(간선, edge)로 이어 놓은 도형을 그래프라고 한다. 그리고 그래프가 전체적으로 이루는 모양을 토폴로지(topology)라고 한다. 그래프는 다시 간선의 방향성 여부에 따라 방향 그래프(directed graph)와 무방향 그래프(undirected graph)로 나뉜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용어들이 중요한 것은 이유가 있다. 컴퓨터 과학에서 다루는 많은 문제들이 그래프의 형식으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터넷이다. 각각의 웹 문서는 정점이고 문서와 문서를 연결하는 하이퍼링크(hyperlink, 줄여서 링크)들은 간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웹 서핑이란 본질적으로 간선을 따라 이동히면서 그래프에 속한 정점들을 탐색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링크란 기본적으로 임의의 문서로 이동하는 길이지만, 그 외에도 많은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한다. 검색 엔진이 문서들의 의미를 추론하고, 그 중요도를 판단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 많은 기능들이 링크만으로 가능하다는 것 - 이것은 웹이라는 매체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웹의 가능성을 가장 크게 제약하는 요소 또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웹이 그래프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면, 토폴로지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웹의 토폴로지는 어떻게 생겼을까? 네트워크 과학의 권위자 바라바시 교수(Albert-László Barabási)에 의하면, 웹의 토폴로지는 최소한 4개의 대륙이 듬성하게 연결되어 있는 꼴이라고 한다(아래 그림). "서로 연결된 웹" 이라는 상식과는 반대로 웹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모든 곳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2]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 원인은 웹의 간선 - 즉, 링크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링크는 하나의 웹 문서에서 또다른 웹 문서로 간단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하는 도구다. 그런데 이건 방향성(directed)이 있다. A 에서 B로 이동할 수는 있어도 B에서 A로 이동하는 링크가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문서로 가는 링크는 있어도 다른 문서에서 오는 링크는 없는 문서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네들끼리는 링크되어 있지만 그 외의 문서들과는 전혀 링크를 주고받지 않는 문서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기존 문서 입장에서는 새 문서가 언제 태어나서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새 문서는 자기로 향하는 간선 - 링크를 획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웹의 세계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웹 검색 엔진들은 이용자들이 자신들의 웹 사이트를 등록할 수 있게 한다. 크롤러가 아무리 열심히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는 문서들이 있기 때문에, 일종의 "제보"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웹은 무한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반면 제보되는 문서들은 그리 많지 않으니, 이 해법은 그저 미봉책에 불과하다.
앞서 이야기했듯, 링크는 웹에서 문서를 열람하고, 의미를 추론하고, 중요도를 평가하는 기본 자료다. 그런데 새 문서들이 링크를 얻질 못하니, 많은 새 문서들은 검색 엔진에서 영원히 가려진 채 웹의 사각지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수집된 문서의 중요도를 판단하거나 의미를 추론하는 데도 활용할 수 없다. 이는 검색의 전체적인 품질과 직결된다. 이렇게 링크의 간편성은 웹 확산의 주인공이지만, 동시에 새 문서의 존재를 탐지하고 검색 품질을 향상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3.
블로그가 개인 홈페이지와 다른 점은 세 가지다. 첫째, 쉽고 강력한 편집 도구. 개인 홈페이지와는 달리 업데이트가 매우 간편하다. 둘째, 최신글이 가장 맨 위에 나오며, rss 피드라는 형식의 구독 장치를 제공한다. 이는 새로 작성된 컨텐츠에 대한 주목성을 높이는 동시에 전파성을 높인다. 셋째, 트랙백의 존재. 다른 블로그의 문서에 트랙백을 검으로써, 자신이 그 문서와 연관되는 컨텐츠를 작성했음을 알릴 수 있다.
위 세 가지는 금방 사그라든 개인 홈페이지 붐과는 달리, 블로그가 크게 융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잘 보면, 이들 중 1, 2번은 블로그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쉽고 강력한 편집 도구는 이미 게시판도 제공하고 있다[^3]. 그리고 많은 뉴스 사이트 등도 rss 피드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니까, 블로그의 고유한 특성은 3번인 트랙백 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니홈피나 트위터 등도 지니지 못한 기능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
트랙백은 웹에서 남의 문서에 링크를 삽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개인 홈페이지 시절에도 남의 문서에 자신의 문서를 링크할 수는 있었다: 주인장에게 메일을 보내서 내가 이런 걸 썼으니 링크 좀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물론 무척이나 귀찮고 성가신 방법이지만, 이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블로그가 등장하고 트랙백이 발명되면서, 이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트랙백 걸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동으로 남의 포스트 아래에 내 포스트를 향한 링크가 삽입된다. 기존의 귀찮은 링크 요청 작업을 자동화함으로써 간편하게 역(逆) 링크를 생성할 수 있게 한 것, 이를 통해 많은 새 문서들을 웹의 IN 영역에서 SCC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 나는 이것이 트랙백의 의의이며 블로그라는 매체가 웹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블로그 이전에는 자신의 문서에만 링크를 삽입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나가는 링크만 있을 뿐 들어오는 링크는 없는 문서들이 대량 양산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말한 링크의 단점들이 최대한 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트랙백이 생김으로써, 새 문서들이 기존 문서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길이 생겼다. 1분 전에 만들어진 블로그라 할지라도 다른 잘 알려진 블로그에 트랙백 하나만 걸면, 검색 엔진은 그 블로그를 탐지하고 분석할 수 있다. 두 포스트가 서로 링크되어 있다면 서로 연관된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고, 트랙백을 받은 블로그가 중요도가 높다면 새 블로그 역시 어느 정도 중요도를 배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이지만 그만큼 검색의 품질도 올라가고, 웹 공간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흔히 블로그의 의의로, 누구나 쉽게 컨텐츠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든다. 물론 그 덕분에 웹 세계에 새 식구들이 많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법, 블로그 상에 아무리 컨텐츠가 많이 올라와 있어도 그 존재를 탐지하고, 의미와 중요도를 분석하고, 검색을 할 수 없다면 의미가 없다. 블로그 이전에는 새 문서가 망각의 장막 속으로 감춰질 위험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블로그는 링크의 단방향성을 보완했고, 기존 웹의 토폴로지를 변화시켰고, 이러한 위험성을 상당히 줄일 수 있게 해주었다.
5.
지난 토요일, 제 3회 인터넷 주인찾기 컨퍼런스에서는 블로그라는 매체에 대해 다각도로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다. 특히 capcold님과 펄님이 매우 좋은 발제를 해 주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내가 너무 늦게 와서 그런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발표를 보지는 못했다.
요컨대, 나는 웹의 특성이 링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블로그의 의의는 기존 웹의 링크 양상(토폴로지)을 변화시킴으로써 웹 공간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블로그라는 매체를 이야기할 때 링크에 대해서는 반드시 논의될 필요가 있다: 블로그는 링크의 어떤 면을 보완했으며, 앞으로 더 보완 발전되어야 할 요소는 무엇이고 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링크의 가능성과 한계에 더 주목하고 그 발전 방향을 모색할 때, 우리가 사는 웹 세계는 더욱 더 풍요롭고 활기찬 공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 A.L. 바바라시,『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개정판)(LINKED: The New Science of Networks)』, 강병남·김기훈 역, 동아시아, 2002
!@#… 정말 다행인건, 트랙백의 특성상 “맞트백 부탁드려염~” 하는 오그라드는 블로그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거죠(핫핫).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냥 발제해버리시지…;;
주석에서 밝혔듯이, 발제를 신청하고 발표를 준비할 틈이 없었습니다. 사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발표를 하기엔 너무 무거운 주제더군요. 네트워크 과학 같은 학문적 배경도 설명을 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잘된 일 같아요. :)
중요한 포인트를 말씀해주셨네요. 오랜만에 바라바시의 링크도 떠올리면서, 잘 읽었습니다.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rss와 마찬가지로 트랙백도 등장하고 얼마 안되어서 게시판 등에 대부분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블로그만의 특성이라고 보긴 어렵지 않을까요? 다만, 그 발생지가 어디인가를 이야기한다면 다를 수 있겠는데요.
몇몇 게시판에 트랙백 등이 적용되긴 했는데, 거의 쓰지는 않았죠. 게시판이라는 것 자체가 옛날 글을 아카이빙하는 목적이 약한지라… 따라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링크, 어마어마하게 중요하죠. : )
가장 본질적인, 그리고 기본이 되는 지적을 해주신 듯요.
다만, 컨퍼런스에서 ‘블로그의 본질’을 다루지 못한(안한?) 것은 고어군 말씀을 들으면 ‘아차!’ 싶은 마음 당연히 생기지만, 당연히 숙지/동의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물론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혁신적이다, 라는 취지에 전폭적으로 공감하는 바, 다음 컨퍼런스에선 그 ‘기본’에 대해서 좀더 숙고하겠습니다.
좋은 리뷰, 논평 고맙습니다. : )
감사합니다. 다음 컨퍼런스에서는 저도 발표자리를 하나 얻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
텍스트큐브에서 작성된 비밀 댓글입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
다만 아쉬운 것이 포털이 블로그를 보급하면서 블로그의 수준이 낮아지고, 링크에다 자신의 의견을 더한 포스팅을 작성한 후에 트랙백을 날리는 블로그의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기능 대신 속칭 펌질이 횡횡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좋은 글은 링크 대신 출처도 없이 이리저리 무단복제되고 최근 웹환경은 페이지랭크 대신 중복 블로그수로 페이지의 가치를 층정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입니다.
예를 들자면 http://goo.gl/nXI09 보통 구글에서 특정 검색어를 입력하면 원본 페이지가 가장 위에 뜨는데 이 글은 완전 뒤죽박죽입니다.
트랙백의 사용은 거의 보기 힘들고 포털의 블로그는 RSS 전체공개조차 지원하지 않고.
그야말로 포털의 블로그가 죽어야 블로그가 산다 고 하고 싶습니다.
확실히 한국적 웹환경이라는 게, 그런 면에서 시궁창스러운 면이 강하죠. 말씀하신 것들은 포탈이 한국 인터넷 환경에 싸지른 악행의 목록에 올려도 무방할 듯 합니다.
* 물론 저는 그네들의 사정도 약간은 이해하는 편입니다만… 아무래도 동종업계 종사자다 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