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13세기를 풍미한 투구인 Great Helm에 대해서 알아봤으니, 이번엔 14세기 중반 이후의 주인공이 된 투구, 배서닛을 소개하겠습니다.

등장

13세기를 풍미한 그레이트 헬름은 매우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 투구였습니다. 하지만 이 투구에는 문제가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나치게 크고 무겁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착용자의 시야와 호흡이 심각하게 제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물론, 그레이트 헬름의 장점이자 특징인 양철 바께쓰"온 얼굴을 완전히 감싸는 디자인"에서 온 것입니다.

https://live.staticflickr.com/65535/51312421783_d7b5fde26f_b.jpg

그레이트 헬름. Pembridge Helm이라 불리는, 전세계에 실물이 10개도 남아있지 않은 유물이다. 투구 아래쪽에 작은 열 십자 구멍이 두 개 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리즈, 로열 아머리 소장. (출처: 개인 촬영. flickr@gorekun)

앞선 포스트에서 그레이트 헬름은 크게 얼굴 앞 장갑판이 장착되는 전기 - 목 방어판이 추가되는 중기 - 정수리/얼굴 상단/얼굴 하단의 3단 구조가 정립되는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진화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중기까지만 해도 그레이트 헬름을 착용하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후기형부터는 투구의 크기와 무게가 굉장히 커졌기 때문에, 이걸 계속 쓰고 전투를 치르는 것은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14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그레이트 헬름의 하단에 구멍을 뚫은 뒤 쇠사슬로 투구와 갑옷을 연결하는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이 쇠사슬을 가드 체인[Guard Chain]이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하면 전투가 치열하지 않을 때는 투구를 벗어 놓았다가, 본격적인 육박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편리하게 착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앞서 10세기~13세기의 갑옷에 대한 글에서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당시의 갑옷은 쇠사슬로 만들어진 후드 티 모양의 갑옷을 머리까지 뒤집어쓰는 형태였습니다. 그레이트 헬름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정수리 부분[coif] 아래에 작은 천 모자를 받쳐 씀으로써 그레이트 헬름의 무게를 완화시켰지요. 이후 가드 체인이 등장하고 그레이트 헬름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게 되자, 아예 코이프의 끄트머리를 잘라내고 이 자리에 Cervelliere이라 불리는 작은 철제 모자를 고정시키는 방식1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그레이트 헬름을 벗어 놓은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방어력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https://live.staticflickr.com/2520/3908468394_cd6f98da63_b.jpg

1300년경의 기사를 재현한 모습. 코이프를 벗고 있는데, 덕분에 그 아래 받쳐 쓰는 검은 모자가 잘 보인다. (출처: flickr)

하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수리 부분에 갑자기 이런 묵직한 걸 달아 놓으니 갑옷을 입기가 영 불편해졌던 것이죠. 결국 1330년에 이르면 얼굴을 둘러싼 쇠사슬 코이프와 정수리를 방어하는 철제 모자 부분이 어엿한 별도의 투구로 분리되게 됩니다 - 이렇게 하면, 갑옷을 입은 다음 투구를 따로 쓰면 되거든요. 이것이 바로 배서닛[Bascinet]이며, 14세기 말~15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전장을 지배한 투구인 것입니다.

보조 방어구에서 독립된 투구로

이렇게 독립된 투구로서 배서닛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안정된 형식으로서 정립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모든 공업 생산품이 그렇듯이, 처음 만들 때는 제대로 만드는 방법을 잘 모르거든요. 현존하는 배서닛 유물들을 살펴보면 배서닛이 처음 등장한 1330년대부터 약 20년간은 정수리 부분을 만드는 데 적어도 3가지 양식이 동시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2.

  1. 목 위를 전부 덮는 원뿔 형태.
  2. 귀 위에서부터 덮는 작고 동글동글한 형태.
  3. 귀 아래 부분부터 덮는 원뿔 형태.

이런 과도기적 투구가 제대로 된 방어력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까지 여전히 그레이트 헬름은 여전히 표준 장비로서의 자리를 고수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기사의 무덤 장식을 보면, 머리에 배서닛을 착용하고 있으면서도 발 밑이나 머리 아래에 그레이트 헬름을 놓은 채로 누워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다. 아직 배서닛은 "그레이트 헬름 안에 받쳐 쓰는 보조 투구" 혹은 "본격적인 육박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단독으로 쓰이는 투구" 정도의 위치였던 것입니다.

https://live.staticflickr.com/5098/5495971961_bbeac88b1f_b.jpg

흑태자 에드워드(1330-76)의 무덤. 14세기 중반에 쓰였던 "귀 아래 부분부터 덮는 원뿔 형태의" 배서닛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배서닛을 착용한 채로 그레이트 헬름을 베고 누운 모습의 무덤장식을 만드는 것은 당시 유행한 무덤양식이기도 하다. (출처: flickr)

하지만 1350년대 이후 형태가 안정적으로 정립되고 생산 방식 역시 발달하면서 배서닛은 독자적으로 충분한 방어력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배서닛이 크고 거추장스러운 그레이트 헬름을 밀어내고 표준적 장비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 것 또한 이 시기부터입니다.


  1. Cervelliere는 이미 12세기 말부터 존재했다. 다만 이 때는 정수리에 걸치는 작은 철제 모자 수준이었고, 그리 대세라 할 만한 물건도 아니었다. 

  2. IBM 호환 PC가 개인용 컴퓨터의 표준이 되기 전까지 시장에 애플 III 등 여러 종류의 컴퓨터가 존재했던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