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메다를 관광하는 플랑드르 백작

귀는 프랑스 국왕에 대한 공포심으로 에드워드와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줄을 잘못 선 셈이 되었다. 전황은 초반부터 잉글랜드에 이롭지가 못했기 때문이다 - 전쟁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던 프랑스 군은 순식간에 가스코뉴로 밀고 들어가 잉글랜드 국왕의 성들을 차례차례 함락시켰다. 보르도Bordeaux 같은 주요 도시들은 일치감치 함락되었고,잉글랜드 해군의 지원을 받은 Bourg나 Blaye와 같은 도시들이 겨우겨우 수비를 해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여기에는 잉글랜드 군대가 멀리 남프랑스의 가스코뉴까지 출진을 할 수가 없어 그곳의 수비는 현지의 군사들에게 맡기고 있는 형편이라는 사정도 한 몫 했다.

플랑드르 백작 귀의 봉인. 1280년.

백작 귀는 군대를 급조해서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1297년 8월 20일 Veurne 시 근처의 Bulskamp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대패한다.

8일 뒤인 28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가 이끄는 소규모의 군대가 플랑드르에 상륙, 백작령의 수도인 겐트Ghent로 진군하기 시작했지만 전세를 뒤집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9월에는 이미 프랑스군이 브뤼주Bruges와 같은 주요 도시를 점령, 통제권을 장악했으며 양자 간의 휴전이 성립된 10월 즈음에는 전 플랑드르의 절반 이상을 접수했다.

사실 플랑드르 전역을 삽시간에 먹어버릴 수 있었던 필립이 휴전으로 물러난 것은, 중세의 전쟁이 거의가 그러하듯 순전히 군사비 문제 때문이었다. 전쟁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고, 안 그래도 잉글랜드하고도 한 판 붙고 있는 마당에 천하의 프랑스 국왕도 그 엄청난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는 없는 바였기 때문이다 -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이면서 자기 수입의 최소 61.5% 이상을 순전히 전쟁 비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될 정도이니까.

필립 4세 시대의 프랑스 은화.

그런데 잉글랜드 국왕의 상황은 더 심각한 상태였다. 풍요로운 농경지와 은광 등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프랑스 국왕에 반해 잉글랜드 국왕의 재정 상태는 그야말로 애들 용돈 수준에 불과했고 - 그 결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는 아예 자기 수익 전체(라고 해봐야 프랑스 국왕의 20%도 안되는)를 전쟁 비용으로 올인해야 했다. 그나마 잉글랜드 국왕에게 큰 돈을 벌게 해주던 남프랑스 영지의 포도주와 플랑드르로 수출되는 영국의 양모는 그 곳이 교전지역이 되면서 잉글랜드 국왕의 수익은 급전직하했다. 이 마당에 잉글랜드가 더 오래 전쟁을 끌 여력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귀의 아들 로베르의 문장
(1300년 백작직을 승계하기 전)

결국 1298년 8월 Ghent 시에서 잉글랜드 병정과 시민들 사이에서 불거진 문제를 빌미로 잉글랜드로 돌아간 에드워드는 같은 해 7월 필립과 강화 조약을 맺고 전쟁을 일단락지었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면 플랑드르 백작은 백작이라기보다는 이미 닭 쫒던 개에 가까웠다.

휴전이 끝난 1300년 1월 6일, 샤를 발루아Charles of Valois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플랑드르 백작령의 나머지를 전부 빼앗기 위한 공격을 재개한다. 이미 나이가 70에 이른 귀는 장자인 로베르Robert of Bethune에게 백작령의 전권을 넘기고 전쟁을 계속했지만 이미 기운 전황을 뒤집지는 못했다. 1300년 5월, 귀와 그의 장남 로베르는 이프르Ypres에 있던 백작령 최후의 요새에서 나와 항복했고, 곧 50여 명의 다른 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플랑드르 백작령은 더 이상 백작령이 아닌, 프랑스 국왕의 영지가 되었다.

플랑드르, 분열되다.

문제는 플랑드르가 이미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플랑드르의 평민들은 일용품에 매겨진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프랑스 국왕이 이것을 해결해 줄 구원자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301년 5월, 필립이 자신의 새 영지를 순방하기 위해 플랑드르를 방문하자 겐트의 시민들은 그들의 새 주군인 필립에게 세금을 줄여 달라고 요구, 이를 윤허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츄에이션이 계속 진행되면 돈자루를 잃게 될 귀족들이 벌벌 떨 것은 당연한 일, 그들은 국왕의 순방길에 평민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여 뭔가를 요구하지 못하게 한다는 묘수를 끄집어냈다. 순방을 마친 프랑스 국왕은 더 이상의 민원을 접수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갔고 시민들의 삶에 나아진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플랑드르는 프랑스 국왕에 크게 실망한 평민들(Liebaart)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성공한 귀족들(Leliaart)로 두 쪽이 났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평민들의 실망은 곧 분노로 이어졌고, 드디어는 폭발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